하나님 나라

여성의 우울증 이야기 4. (케이스 1,2)

두 아들 아빠 2006. 9. 20. 08:41
 케이스 1.

무조건 남편에게 매달리거나, 겉으로나마 남편을 믿는다는 여성은 자신의 위치를 노예의 신분임을 스스로 인정 해야 한다. 살림을 그런대로 이끌어 가고, 주인이 없는 낮에는 동네 아줌마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나 떨면서 주인이 오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집안에서 뽀사시하게 대기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자녀들이 독립적인 존재로 커가면서 여기저기 이유 없이 아프며, 어려움을 겪는다.

나이 탓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으며, 그동안 믿어왔다던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주인을 모시고 산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얼마나 치사한 일이 많았던가!

나이를 먹어 감에 그동안 잃었던 자존감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그래서 때론 남편에게 깡짜를 부려 보기도 한다.

주인인 남편의 반응은 뜨악한 것이다. 그동안 잘 지내오더니 왜 그러느냐는 투다.

서로가 골치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갱년기나 호르몬 탓으로 돌리는 것이 편하다.


자신의 떨어진 의식은 자기 자녀는 물론, 남의 자식(며느리, 사위)에게 밀리고 치어서, 돈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받지 못한다. 이런 경우는 부지런히 돈을 모아두어야 한다.

자존감이 없이 살아온 여성의 경우는 나이를 먹으면 무기력증을 호소한다. 몇 칠씩 할 일을 미루어 놓고는 ‘힘들다’와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자살의 유혹이 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자살은 애초에 적당한 자존감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숨은 쉬고 있으나 죽은 사람과 진배없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의식을 올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워낙에 밑바탕이 없는 의식구조에서 책을 본다고 올려지는 것도 아니다. 주변에 의식이 있는 사람과 교제를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게 어려운 현실이다. 교회나 절을 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떨어진 의식을 이용해서 돈만 밝히지, 정작 의식을 올려 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올바른 의식이 생성되면 그곳에 더 이상 가지 않으니까.


가정을 이룬 여성이 자녀와 아니면 혼자서 예배당에 가는 경우가 많다. 남편들은 가정생활에 지장이 없는 한 여성의 신앙생활을 말리지 않는다. 이마저 말리면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몰라서이다.

기도를 많이 해서 남편의 복이라도 불러올 줄 아는데, 아내가 새벽기도에서 무슨 내용의 기도를 하는지 아는가?

네 복을 빌어 준다고?



 케이스 2.

좀 일찍부터 남편을 인정하지 않는 여성이다.

이런 여성 중에는 의식이 남자보다 뛰어난 경우가 더러 있다. 현실에서 그런 의식이 표현되거나 인정받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자녀교육에서 나타내기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열심과 가르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과 사는 남자는 약간의 피해의식이 쌓이기 마련이다. 뭔가 아내에게 밀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정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이를 동물적 직감으로 느낀다. 그래서 아내를 다른 방법으로 억압하려 하거나, 별것 아닌 것이라도 자신의 억지 주장을 아내에게 끝까지 관철하려 든다. 가령 잠을 안 재우고 계속이야기 한다.


여자는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딱하니 뭐라 꼬집어서 말 할 수도 없다.

이 세상이 생산성을 중심으로 가치기준을 두어서, 돈을 벌어 오지 못하는 주부는 도무지 힘으로 쳐주지 않는 현실에서 의식이란 것을 내세울 수가 없다. 그래도 이 경우는 본인은 엄청나게 억울하고, 힘들지만 가정과 자신의 삶을 비교적 잘 이끌어 간다. ‘의식의 진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는 이마져도 다 떨어져 간다.


소결

‘능력 있는 여자’의 반대는 ‘능력 없는 여자’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여자의 능력은 남자의 것과 비교하고, 평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 사회적으로 여성의 경제적인 능력을 높이 사는 추세는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 낸 진화된 또 다른 여성에 대한 착취며, 교묘한 술책이다.


다른 측면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억압받았던 여성들의 반란이기도 한다.

태고 적부터 남자들은 힘으로 여자를 억압하고, 착취하였다. 남자의 힘은 억압의 도구가 아니라 권위를 확실히 인정받기 위한 ‘권능의 왕관’이다. 이를 계속에서 억압의 방편으로 사용해 와서 이젠 그 힘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논리의 비약은 끝이 없습니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씁니다.)


하나님은 남자들이 농경사회에서 노동이 벅차서 그런 줄 아시고, 기계가 일을 대신 해주는 산업사회로 진보가 되었는데도 여자를 억압하는 구도가 바뀌지 않으니까 이제는 여자도 키보드에 손가락만 놀려도 먹고사는 정보화 시대를 여신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의 남자는 이사 짐을 싸는 힘도 필요 없게 만드셨다. 그래서 늙어서 이사를 갈 때는 아내가 좋아하는 개를 안고 이사짐차의 조수석에 얼른 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버리고 간다.


과거에는 자녀와 남편에게 헌신하며, 매달려 살았어도 어렵지만 중년 이후에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남편을 피 할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남편의 관심사에 주의를 기우려야한다. 점차적으로 부부의 문제로 옮겨가야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엔 이미 마음의 간격이 너무 크다. 그래서 남편의 힘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여성도 있다.

남자가 나이가 들어서 힘이 떨어졌다고 달콤했던 권력의 의지를 내려놓는 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이를 간파한 여성들이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없다며, 황혼이혼을 감행한다. 황혼이혼을 당한 남자들은 그동안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아내에게 고개 숙여서 감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황당하다고? 자신은 한순간 황당하지만 수 십 년을 억울하게 살아 온 아내의 마음을 외면 한 체 살아온 자신의 폭정과 무지를 탓해야 한다.

 

-다음은 억울함의 원천에 관하여 돈, 시댁, 용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