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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혁명 2

두 아들 아빠 2006. 3. 27. 16:53

앞서 살펴본 바는 의식수준 수치가 20부터 200까지 이다. 전 인류 중 85%가 200 이하에 속한다고 한다. 의식수치 300은 150의 두배가 아니라 300의 10승을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 인간이 평생 노력을 해도 수치 5 이상을 올리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아주 특별한 경우, 예를 들어서 완전한 죽음 앞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나, 오랜 세월동안 구도의 길을 걸어서 종교에 의한 영성적인 체험을 한 경우는 수치의 급상승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정신을 완전히 놓은 상태에서의 기적적인 회생이나 종교의 영성체험을 자기최면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예외입니다.

 

의식수치 200 이하는 그저 삶의 기본적인 것만 충족을 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이상의 단계에 대하여 살펴 본다.

 

에너지 수준 250 : 중용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 현실적인 파악 능력을 갖게 해준다.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결과를 비교적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패배하거나 좌절하거나 놀라는 일도 없게 된다.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다고 보고 자기 인생이 어찌 굴러가던 근본적인 수용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250의 수준에 이르었다고 보아도 좋다.

함께 지내기 쉽고 친하게 지내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대립과 경쟁심리, 죄책감 등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정서가 안정 되어있다. 이단계에 다달은 사람은 자유를 아주 중시하므로 그들을 규제하는 일은 아주 어렵다.

 

에너지 수준 310 자발성

한 마디로 기꺼이 참여하는 자세이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수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진실로 친절하게 대하고, 사회적 . 경제적 성공이 저절로 따른다. 실직을 하여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일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사회를 움직이고 사회에 실질적인 기여를 한다.

 

에너지 수준 350 : 포용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경험을 창조하고 원천이 된다는 이해를 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수준에 있는 사람은 옳고 그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문제 해결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정열을 쏟는다. 극단주의을 택하지 않고, 차별과 편협을 초월한다.

평등이란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에 눈을 뜸으로써, 거부하기보다는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위의 조건들은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유효하다.

술마시고.. 어쩌다..기분이 좋아서.. 아닙니다.

 -다음에 이어서-

 

에너지 수준 400 : 이성

이단계는 아래 단계와 윗 단계의 중간에 위치하지 않은 묘한 면이있다.

개념화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점차 증가된다. 교육과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구되곤 한다.

노벨상 수상자, 아인슈타인, 프로이드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 수준은 결점이 있다. 상징과 그 상징이 뜻하는 바를 뚜렸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또 세상사에 대한 객관적. 주관적인 이원론 때문에 사물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은 광범위한 지식과 문헌을 생산해 내지만, 방대한 자료와 결론 사이의 모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수준을 초월하기란 쉽지 않다.

그 사람이 황우석박사가 아닌가?

 

에너지 수준 500 : 사랑

(여기에서 책 내용과 느낀 바를 끝내려고 한다.

이 아래 수준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 이상은 알아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너도 나도 이야기 하는 사랑은 분명 아니다.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 증대하여 문제의 핵심을 꿰뚫울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게 됨에 따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볼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전후 과정을 섬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있다.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전체를 다룬다. 직감 혹은 유감이라고 불리는 이 사랑의 능력은 사물을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이 수준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의 단계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혹당하고 있고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500 혹은 그 이상의 수치로 측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0.4%만이 이러한 수준의 의식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참고로 다음 수준은

 

540 : 기쁨 : 성인, 영적인 치유자 등

600 : 평화 : 천만명 중 한명

700~1000 : 깨달음 -  힌두교의 트라슈나, 불교의 부처, 기독교의 예수그리스도가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한다.

 

사람은 어디까지 가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