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퍼런 80년 초 신촌에 가게의 이름이 아주 불순한(?) ‘러쉬’(rush)라는 생맥주집이 있었다.
철길 다리 밑을 지나 로타리 방향으로 약 50m 우측에 있었는데, 홀과 주방을 포함하여 가로와 새로가 각각 2m, 10m 내외의 아주 협소한 공간이었다. 음악은 LP 레코드판이었는데 하드락을 엄청나게 크게 틀었다. 그 안에서는 평상시 목소로 대화가 불가능 했다.주인아저씨는 히피스타일의 머리에 학구적인 검정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손님이 음악소리를 줄여 달라면 다른 집을 가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주인 양반은 여기는 도청 장치를 해도 소용없다고 늘 자랑을 했다. 그러니 안심하고 시국 이야기해도 좋다고 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벌어지는 데모와 그로인해 메케한 최루 가스가 뒤범벅이 된 거리에 어둠이 오면 그 날의 전과(?)와 역사와 시국관을 술집에서 쏟아내곤 했다. 돈이 없기는 매일반인 학생들은 전당포에 시계며, 전자계산기 등을 저당 잡혀서 술값을 치루 곤 했다.
당시에 운동권과 학생들은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친일반민족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역사라고 의견이 통일 되었고, 작금의 상황은 미국의 식민지지배 구조라고 규정했다. 앞의 역사인식은 실정법으로 죄가 되지 않지만 뒤의 것은 아직도 살아 있는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되었다.
386 운동권이 왜 강금실에게 열광을 하면 법정에서 강판사를 만나면 이따위 것들은 망치소릴 유난히 크게 치면서 다 무죄를 선고했다. 그것도 눈웃음 살살치면서...
문제는 무죄 선고 받은 학생들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할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운동권이 공부는 하지 않고 데모만 했다는 사람은 당시 대학애 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다.
81년 졸업정원제를 도입하여 대학생의 수를 크게 늘려서 사회적인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지만 돌 던지는 대학생을 더 많이 양산한 꼴이 되어 86년 민주화가 성공한 한 요인이 되었다.
그 때는 몇몇 학과를 빼고 대학생이 공부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말이 졸업 정원제지 여기에 걸려서 졸업을 못한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취직 잘되지 공부을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감옥 간 재수 없는 운동권은 그 안에서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었다.
정신을 차려서 주변을 돌아보니 샐러드 안주에 생맥주를 마시는 모습에 우리의 대선배들이 일제 시절에 왜색 뽕짝을 크게 틀어 놓고 일본 오뎅을 안주 삼아서 청주를 마시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침 튀겨 규탄하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