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예전에 사람들이 무척 많이 체했다는 생각이 든다. 먹는 것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왜들 그렇게 많이, 자주 체했는지 모를 일이다. 육식이라 해야 고작 명절이나 제사 때나 먹고 과식을 할 거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할 때는 허기지다가 뭔가 먹을거리가 생기면 왕창 먹어 댔기 에도 그렇고, 여하간 많이 체해서 바늘로 손톱 위를 따고 등뼈를 위에서 아래로 눌러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그 유명한 00 표 가스 활명수를 마셔 되곤 했다. 이를 가정의 상비약으로 준비되기도 했다. 배가 아프면 무조건 먹었던 기억도 있고 어린이들은 달콤한 맛에 배가 아프지도 않은데 먹은 적도 있었다.
우리 집엔 밥상머리 군기라는 것이 있었다. 음식을 씹는 소리가 요란해선 안 되고, 수저나 젓가락을 떨어트리셔도 안 되며, 밥을 먹는 동안에 일체의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오로지 가정의 최고의 권력자인 아버지만 할 수 있었다. 대게의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정에 아이들 편을 들어 주려고 어머니가 끼어들어 봤자 아버지로부터 핀잔만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어릴 적 기억 속의 스틸 사진 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밥을 먹을 때 두 형들이 아버지로부터 혼이 나서 입안에 있던 밥을 씹지 못하고 얼어서 굳어있는 장면이다. 그렇게 먹은 밥이 체하지 않았다면 사춘기 소년들의 왕성한 식욕과 소화력 때문일 꺼다. 참담한 표정과 두려움이 교차된 그 표정들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버지가 역정을 얼마나 내셨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지만 활동사진이 아닌 정지 된 장면으로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도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거의 최근에서야 기억 속에서 발굴된 장면이다.
자주체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았나 싶다. 애들, 여성들 그리고 어머니들이었다. 음식을 먹는 분위기나 자세, 온도, 음식의 종류에 따라서 체하는 정도가 다르지만 여하간 즐거운 마음으로 먹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야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가족 구성원을 ‘식구’(食口)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슬픈 역사다. 인격체를 ‘먹는 입’으로 표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입 하나 늘었다’라고 하고 딸이 출가 하면 ‘입 하나 줄었다.’라고 했다.
아주 험악한 말이지만 ‘자식은 때려는 죽여도 굶겨죽이지는 못한다.’고 했다. 또 ‘자식의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만큼 좋은 것은 없다.‘라는 말도 있다. 일상이기는 하지만 가족이 둘러 앉아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어찌 보면 종교적인 의식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버지가 지은 농사나, 벌어온 돈으로 어머니가 음식을 장만하여 자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벌어 오고, 지은 부모는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서 노고의 위안을 받고 그 자식들은 부모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밥을 먹는다. 그렇지 않는 이유가 뭘까?
아버지 안에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란 가시덤불 위에서 땀 흘려는 노고로 먹고 살게 되어있다. 그게 운명이다. 여기에 비굴함이 덧칠되면 억울함이 생성되게 마련이다. 비굴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은 만들 수 없는가! 쉽게 돈을 버는 사람은 어떤가! 이른바 자수성가형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못마땅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수시로 역정을 내고 부딪치기 마련이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말이 있다. 체증은 내려갔을지 모르지만 그리 오랜 세월 동안 담고 있었다면 아마도 소화기 어딘가는 난리가 났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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