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비오는 날의 상념

두 아들 아빠 2006. 7. 12. 12:52

제 전공은 토목입니다. 구체적으로 현장 시공입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토목건설 현장은 공을 칩니다. 지금은 현장 근무를 하지 않지만 이런 날에는 아주 큰 비가 아니라면 일찌감치 점심을 먹으러 가서 저녁까지 술판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책임자가 아닐 경우에는 좋지만 현장소장이 되고 나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제밤 처럼 밤새 비가 내리면 정말 잠을 온전히 잘 수 없습니다. 새벽같이 현장으로 내달아야 하지요.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1997년 여름입니다.

인천의 문학지구 택지조성공사 현장 소장으로 근무 할 때 엄청나게 비가 온 적이 있었습니다.

여름휴가를 끝내고 첫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저희 현장 옆에는 문학종합경기장이 한참 건설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감리원 한 명이 불어난 물에 휩쓸려 맨홀에 빠져서 익사를 했습니다.

현장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받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과 거의 동시에 저가 근무하는 현장에서도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가 길옆 가 배수로에 휩쓸려 들어가서 다음날 아침 현장에서 3km떨어진 하천 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날이 방학기간 중에 있는 임시 소집일 이었는데 선생님들이 큰 비가 지나고 나서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나 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아이들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학교에 나와서 담당 선생님들도 없었다고 합니다.

도로에 물이 넘쳐 길이 구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발을 헛 딛은 것이죠. 다행이 한명은 안전 휀스를 붙잡고 나왔고 한 아이는 하수구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119가 출동하고 현장에 대기 중인 중장비와 인력을 동원해서 아이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아이의 부모는 울부짖고....

 

저는 이 사건으로 현장 최고 책임자로서 업무상 과실 치사로 입건되었습니다. 당시 재해성 폭우가 인정되고, 이에 대한 안전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제삼자 재해에 관한 보험이 들어 있어서 정상 참작 되어 구속을 면하고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아이의 부모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어서 늘 가슴 한편에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나 이런 날에는...

 

그날 이후 저에게 '비'는 결코 낭만적일 수 없었습니다. 어제 밤에 밤새 내린 비로 그 때 생각이 나서 잠을 설쳤습니다. 이런 날에는 그냥 술에 취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재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확인을 한다며 무리하게 현장에 접근하면 안 됩니다.

그런 지시를 내려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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