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노 무현을 욕하는 사람들의 정신분석

두 아들 아빠 2006. 11. 27. 06:08
 정치나 대통령근황, 청와대 인터넷기사의 댓글을 보면 나름대로 논리를 갖춘 글도 있으나, 대부분 무자비한 욕설이다. 심각한 수준의 정신병적 성향도 엿보인다.

대통령의 평가를 두고 역사상 이토록 극단적인 반응과 대립을 보인 적는 없었다.

변호사 출신인 노 무현 대통령은 말년에 이런 부지기수의 글에 대하여 명예훼손 민사 소송만 걸어도 100세까지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을 지경이다.

어떻게 대통령 한 사람에게 수많은 국민들이 이렇게 봇물처럼 쏟아 부을 수 있는가? 이들의 광적인 분노가 너무나 궁금했다.


과거 억압적인 권위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질서로 탈바꿈하는 요즈음 어찌 보면 당연하고, 예상된 상황이나 이에 관하여 전문가의 심도 있는 연구가 아쉽다.

아마도 이를 연구해야 할 대학교수나 사회학자는 물론 병원의 신경정신과의사들 마저 집단적으로 ‘대통령 이지매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사람은 신체적 질병의 증상을 들으면 우선 이에 관련된 자신의 몸부터 더듬는다. 하지만 정신병적 증상을 들으면 주변의 남부터 떠올린다. 심리적으로 인간의 자기방어 기제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현상이다.


정신질환의 원인으로 심리적, 사회적, 기질적 원인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내적요인과 외적 요인으로도 나누는데, 내적요인으로는 유전, 체질, 나이, 성, 인종 등으로 구분되며, 외적요인으로는 인간 관계성, 사회 변혁의 속도, 전쟁, 천재지변 등이 있다.


신경증은 억압되었던 것의 재기현상으로 일어나나, 정신병에서는 재기하는 억압된 소재가 보다 원시적이며 되돌아간 자아-초자아 체계가 더욱 혼돈적이다.


정신병 환자에게서 유아 갈등의 역할은 신경증 환자의 경우와 같다. 즉 정신병 환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유아갈등의 분출에 대해서 계속 방어를 해왔다. 더구나 오랫동안 권위주의로 억압된 사회와 가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온전한 자기방어 기제가 완전히 소진되어 인성이 무너지면 방어가 아닌 공격적인 기제가 표출된다.

노 무현을 욕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증상이 보이고 있다. 약한 증세부터 차례로 살펴본다.

 

 

스톡홀롬 신드롬(Stockholm Syndrome)

인질범에게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고 있는 기간이 길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자로부터 풀려나도 억압자에게 느끼는 연민과 종속적인 관계 유지를 연장하려는 심리이다. 오늘날의 현상을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서 지적한 바 있다.

 

독재는 국민을 인질로 잡는 것, 인질은 정신적으로 한 줄로 세워야~

야만적인 힘 아래 삶이란 굴욕적인 상황을 전제로 한다. 독재자는 피지배자에게서 굴욕이 창피라는 사실을 지우게 해야 한다. 노예의 삶이 그런 것이다.

물리적인 힘을 자주 쓰지 않고 대중을 억압하려면, 먼저 사회를 하나의 목표점으로 통합해야 한다. 박정희는 학교 교육을 한 줄서기로 만들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사학은 없다. 불의한 정권에게 당근을 받는 대신에 정권에게 정당성을 주고 사학의 이념이나 독창성은 포기를 했다. 어차피 자존심은 버려져서 창피함도 모르고 재물이나 밝히게 되어있다.

 

기독교 교단의 학교마저도 국가가 공짜로 주는 당근에 취해서 허우적거리며 예수를 믿지 않는 학생들도 받아 억지로 예배를 보게 하다가 이에 저항하는 어린학생에게 개망신을 당하고도 도무지 창피 한줄 모른다.

오늘날 창피함은 인격이 아니라 단지 돈이 없는 것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면 국민들은 창피함을 잊는다.

‘창피함이란 인격을 지키는 최소한의 보루이다.’


독재자는 여러모로 통합시킨 사회를 큰 범위에서 점차적으로 조여 간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낙오자로 낙인찍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면 된다.

가끔은 극악적인 야만의 힘을 써서 몇 사람의 생명을 앗아 공포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이를 언제든지 제어할 아주 훌륭한(?) 법이다.

과거 수구세력들이 이 법의 폐지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다시 정권을 잡을 때 쓰겠다는 의지보다는 법이 폐지가 되면 이 법을 사용하여 저지른 짓이 악으로 남기 때문이다. 빨갱이가 아닌데도 뒤집어 씌워 죽이거나 감옥에 처넣은 일이 많았다.

이를 단 한번만 써먹었다고 해도 폐지해야 할 이유가 되며, 공포분위를 조성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적법을 가장한 패악을 감추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법을 유지시켜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기에 빨갱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친일파에게 빨갱이는 구세주이다. 자신들이 궁지에 몰리면 그렇게 만든 상대를 언제든지 몰고 갈 수 있다. 국민들을 상대로 철저한 반공교육의 실시는 빨갱이를 잡기보다는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빨갱이라는 적을 향해 온 국민을 한 줄서기로 만들어 왔다.

역사학자들은 한반도에서 쇠퇴의 기로 선 친일파에게 공산주의라는 선물이 때마침 주어 진 우연을 설명해야 한다.


 

퇴행성 신경질환형(退行性 神經疾患形)

정신병에서는 대상관계, 자기존중, 자기보호기제가 심하게 파괴된 경우가 흔히 있다.

또한 정신병은 ‘심한 전면적 퇴행의 산물’이다. 정신병의 퇴행은 부분적이 아니라 전면적이며 또한 재생된 고착지점이 신경증보다 더 원시적이므로 정신병의 경험과 행동은 더 원시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엘리트의식의 원조는 일제시절에 신교육을 받은 자들이며 이들 중에 상당수가 친일파 이다. 독재자와 기득권자들은 엘리트 의식 고취와 학벌주의를 늘 추구한다.

그래서 우리사회 전체가 학벌주의를 지향하다보니 수 십 년 전에 나온 대학을 아직도 자랑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된다. 당시에 배운 지식은 이제 고물상도 받지 않는다. 돈 내고 버려야 할 지식을 자랑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여정을 말해야 한다.

 

유명 대학을 다녔던 자부심 많던 시절이나, 한 때 잘 나갔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나, 정신까지 퇴행하면 안 된다. 나이를 먹고 사회, 경제 시스템이 변화됨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의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욕을 한다고 뭐가 해결이 되는가?

자신의 영혼과 가정만 황폐할 뿐이다.



망상증형(妄想症形)

망상은 기본적으로 과거 가치에서 현실관계를 되찾으려는 시도이며, 퇴행에 의해서 상실된 것을 재건하려는 경우도 있다.  ‘망상’은 정신병의 타협의 형태로써 신경증 증상과 결부되어있다.


생존의 망상증을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는 삼척 무장공비 사태에서 일어났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다.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가 거짓이었다는 논란이 일었지만 사실 여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망상증을 키우려면 생존을 위협하는 적을 만들어야 한다. 아주 잔인한 적이 더 효과 적이다. 남, 북은 그동안 국민과 인민을 상대로 적을 만들고 적개심을 고취 해왔다.

남한은 북한 정권 수뇌부를 겨냥하고, 중국과 구소련에 대한 적개심은 느슨했다. 북한은 남한의 정부를 괴뢰정부라 하며 미국과, 일본 모두를 적으로 삼았다.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적이 갑자기 적이 아닌 동반자가 되면 국민들 중 일부는 정신적 패닉 현상이 온다. 남북한의 화해를 극열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경제의 망상은 생존의 망상을 밑바탕으로 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다가 온다.

수많은 부를 축척 해온 기득권은 경제의 파이를 계속 키우고자 고 한다.

경제에서 무한 질주란 있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나라의 경제 볼륨은 한계가 있으며 예측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따라서 경제의 정의와 부의 올바른 관념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네델란드는 17세기 큰 배와 세계 최대의 무역 선단을 이용하여 엄청난 국부를 쌓았지만

영국과 경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한낱 모직물 때문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네델란드는 부에 관한 관념이 청도교적으로 무장되어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잘 살고 있다.

 

부에 관한 최소한의 관념도 없는 기득권들이 경제를 논 할 때는 의심의 눈초리로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한나라당과 수구 언론들은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초기부터 줄 창 주장해왔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나라 경제에 관하여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고작 대안이라는 것이 세금을 줄이고, 정부 규모를 작게 해서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뿐이다.

이를 잘 생각해보면 세금이란 자신들과 같이 있는 자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고, 정부 규모를 줄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적인 참여 정부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과대망상증형(誇大妄想症形)

과대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일관적이며 환각이나 환청을 수반하지 않는다. 중년 이후에 서서히 증세를 나타내며 남성에게 많다.

과대망상의 종류는 자신이 고귀한 출신이라고 확신하는 혈통망상(엘리트 의식), 자기의 지위·재산·생명이 위협당한다고 생각하는 피해(박해)망상, 이에 불이익을 입었다고 확신하고 권리의 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호소망상(好訴妄想), 일반적으로는 자아감정이 고양되어 지속적인 강도(强度)와 자극성을 나타낸다. 인격의 붕괴가 비교적 적으나 가장 심각한 정신분열증의 전단계이며 언제든지 전위 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기득권의 일부 계층은 혈통망상에서 오는 피해망상과 호소망상이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자신들에게 오는 이런 망상증을 일반 국민에게 전위 시키고 있으며, 실제로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열증형(精神分裂症形)

개인적으로는 부모의 초기사망과 이혼, 행동이 비이성적이고 정서적으로 혼란된 부모들의 영향 및 부모 사이의 불화 등의 가족관계가 정신분열증의 요인으로 지목된다.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의 작용을 상승시키는 것은 정신분열증적 증후를 심화시키는데 이는 도파민 대사에서의 이상이 정신분열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증상은 비정상적인 정서의 표현 및 사고형태가 나타나는데 지각의 혼란, 현실로부터의 퇴행, 괴상한 언어나 행동, 망상과 환각 등으로서 현실세계와는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환각이나 망상적 행동을 하게 되고 슬픈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웃는다거나 별안간 웃거나 우는 등 상황에 맞지 않는 감정의 표현을 하기도 한다.


좀 낮은 수준의 이런 증상은 우리 사회에 이미 널리 펴져있다. 분노를 해야 할 때에 비웃음을 흘리고, 양보를 했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것을 감정의 폭발로 이어지거나, 굴욕적인 상황을 관습이라는 미명으로 넘어가고, 도무지 창피함이 무엇인지 구분할지 모르는 현상은 다 정신분열증의 초기 증상이다.

우리의 과거사가 아주 낮은 수준의 정의와 선으로 이루어져서 편법을 무수히 저지르고, 야만이 용인되어 오다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대 혼란이 정신분열증까지 오고 있다.


사람이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자주하면 거짓을 스스로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조, 중, 동의 논조가 그런 식인데 처음에는 노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내려 깔기 위해서 서서히 하던 거짓말이 이제는 정상적인 내부 통제 기능이 상실하였다.

사설의 논조가 비판의 수준을 넘은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분노의 단계에 와 있다. 과거 독재자들이 국민을 인질 삼아서 영혼을 황패하게 하였다면 언론들은 한 층 더해 정신분열증세까지 몰고 가고 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 이들 신문을 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외

아래는 노무현대통령을 욕하는 사람들 중에서 신경증이나 정신병은 아니지만, 사회적 관계성이 결여되고, 인성의 균형감이 떨어지며, 자기중심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정신과 치료로 구제 할 방법이 없다. 어느 시대나 있는 사람들로 법적인 규제 안에서 통제를 받아야 할 집단이다.


단순, 무식형(單純無識形)

배우지 못한 것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지만, 세상과 진리를 살피는 눈이 없는, 허접한 자기논리로 자기 성을 완고하게 쌓아가는 일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행인 점은 이런 사람들은 좀 처럼 정신병적인 문제가 발행하지 않는다.


부화뇌동형(附和雷同形)

일부 언론들의 보도를 맹신하여 남들이 욕하니 자신도 따라하는 경우이다. 이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사회주류층에 동참하고, 동조하는 것에서 찾는다. 주류세력이 온전한지 불의한지는 살피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것에는 관심도, 살피는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단 한 가지 확고함은 대중과의 분리는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절대 그 범주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확신범형(確信犯形)

자신이 저지른 반사회적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고, 잘못이 아니라는 확신을 하는 자이다. 조, 중, 동이라 불리 우는 신문의 데스크가 그런 경우고, 김근태와 유시민도 한 때는 확신범이었다.

넓게는 구질서나 신질서를 거부하고,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서만 가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기득권은 자기 성공에 취해서 오만함이 극에 다다라서 도무지 남을 배려 할 줄 모르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깔보기를 밥 먹듯이 하기 쉽다. 이들 밑에는 스톡홀롬 신드롬이나, 퇴행성 신경질환형 환자들과 단순 무식형과 부화뇌동형이 목을 길게 빼고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편승된 우월감에 도취되어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박정희 개발 신드롬’에 사로 잡혀있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가 여기에 속한다. 아버지와 딸을 연관 시킨다는 자체가 김일성의 위업을 받든 김정일을 지지하는 북한과 무엇이 다른가? 다르다면 북한은 억압적 이었다면 우리는 스스로 옭아 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는 진보세력은 과거 사회의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저항의 이유가 기득권의 해체로 자신이 유익을 얻고자 하는 의도는 역사적으로 반란으로 치부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동학의 교주와 다른 생각을 품은 대중은 외세까지 끌어 드린 집권자에게 처절하게 당했다. 가짜 진보들은 노대통령에게 배신감의 각을 세우고 있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에 관하여는 엄청나게 관대하며, 지극히 타협적이다. 그래서 잘못을 속죄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 마련이다. 이게 자신의 정신건강에 유리하다고 판단 할지 모르나 그런 인격 안에는 정의와 선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 그저 힘이 있어 이기는 자가 정의이고, 시간과 돈이 있어야 선을 배 푼다고 한다. 그래서 정의와 선은 힘 있는 자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자기로부터 멀찌감치 떼어 놓는다.


 

소결

노대통령을 욕하기 전에 먼저 되돌아 봐야 할 것이 있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 상태에서 자신과 가정 역시 온전할 일이 없다. 요즈음 가정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이 단지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영향이 큰 원인 중에 하나이다.


시대의 흐름을 대통령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는 시대가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측면이 있다. 역사학의 한계는 역사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우연을 인간의 논리로 설명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는 인간이 애써 부정하려는 창조주의 섭리가 있는 것이다.


발전적인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면 영혼의 낙오이다.

늙은이의 슬픔을 대부분 나이 탓으로 하지만, 자신이 살아 온 과정만 중시하고,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더 외로운 것이다. 대게 세상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는 사람들이 말년에 느끼는 혹독한 외로움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왜곡되고, 야만적인 독재에서 정상적이고 탈권위주의로 가는 과정이다.


‘불의’에 대항하는 행동은 당연 용기 있는 ‘정의’이다.

억압적인 권위주의에 대항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용기도 필요하지만 저항행동 이전에 확고한 의식이 받쳐주어야 한다.

과거에 386세대 중에서 의식이 앞서 갔던 자들의 군사독재 정권에 돌을 던지며 싸워서 독재의 망상은 지워졌지만, 이제는 권력자의 입장에 서서 본격적인 의식의 대결을 벌이고 있다. 이들을 계속해서 좌파라고 매도하는 것은 자신들을 극적으로 부활해준 빨갱이를 새롭게 만들려는 짓이다. 역사의 우연은 사람이 만들지 못한다.


서민의 삶을 되돌아보자.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일터로 나가고, 일터에서 죽어라 일하고 일이 끝나 잠을 잘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아무리 잘 이용한다고 해도 정신없이 술을 퍼마시거나 가족을 팽개치고 취미 생활을 하고, 아니면 텔레비전을 보다가 손에든 리모콘을 떨어뜨리고 만다. 기껏 잘 한다는 일이 자기 육신만을 위한 운동일 뿐이다.

좀 여유가 있는 자들은 돈을 어떻게 쓸까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돈을 벌수 있을까에 몰두한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영혼’은 존재했는가?

 

‘정신’은 종교적인 '영혼'이라는 말을 대신하기에 적절한 낱말이다.

‘정신을 차리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영혼을 찾으라’는 뜻이다.

우리의 영혼을 세상의 보이는 것에 치중하다 보면 구원 받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