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혜신의 노무현대통령 정신분석을 말한다.

두 아들 아빠 2006. 12. 2. 08:53

 

 정혜신의 노무현 정신분석

 

대한민국의 대표남자라고 불리 우는 정치인, 연예인, 방송인, 기업인 등이 요즈음

정 혜신 정신과의사 앞에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다. 마초근성이 있는 남자들은

더욱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중년남자 심리 전문가라고 자칭한다.

그녀의 날카로운 정신분석에 공개적으로 대꾸를 한 사람이 유 시민 한 명뿐이다.

의사 앞에서 솔직해지는 게 환자의 심리인가 보다. 똑똑함에 시비를 거는 그녀에게

자신은 중학교 때 성적이 전교 100등을 왔다 갔다 했다고 고백했다.

세상의 마초들은 더 처절한 분석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문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보람을 느끼고 더욱 철저하게 남성들의 심리를 분석 했으며,

드디어 노대통령에게도 정신과 청진기를 들이댔다.

정혜신(1964년생 연세대의대 졸업, 심리분석연구소 대표)

(아래 굵은 글씨는 그녀의 글 원문이며, 파란글씨는 나의 주석이다.)

 

  

 

정신분석학으로 본 노 대통령

오늘날의 정신과는 환자와 상담을 통한 치료보다는 이미 인간의 정신은 뇌 스캔과

호르몬 분비 구조 등으로 완전히 파악했다며 약물치료에 치중한다. 하기야

3~5분 안에 환자를 갈아 치워 받아야 돈이 되니까 어쩔 수가 없다.

오늘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정신과 치료 현장에서는 퇴물로 취급되고 있다.

보다 진전된 학설이 나오기 전에 기존 학설의 비평작업은 당연하다.

프로이드를 대처 할 이론이 아직 없는 상황에 논리적인 비평도 없이 이전의 학설을

완전히 내모는 일은 아주 보기 드문 경우다.

이러한 현실 속에 그녀가 정신분석학에 열심을 내는 일은 높이 살만하며,

대통령을 정신과 환자로 올려놓을 수 있는 이 시대가 너무 좋다.

 

지난 주 ‘국민과의 대화’에 나선 대통령의 육성에는 착잡함과 답답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자신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국민들에 대해 답답함을 넘어서

억울함이나 분노까지 생긴 듯했다. 그의 정확한 어법뿐 아니라 비언어적

요소까지를 포함한 시청소감이 그렇다.

사람이 가장 억울할 때가 오해를 받을 때이다. 더구나 진정성이 왜곡되면 분노는

당연히 일어난다. 대통령은 사람이 아닌가?

 그녀가 말한 ‘대통령 중독증’에 자신이 걸려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것이 비언어적

요소인지 밝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정신과의사와 언어학자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보기에 근래 노대통령의 속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발언은 그의

민심론이다. 그는 “역사속에서 구현되는 민심을 읽는 것과 국민들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되는 민심을 다르게 읽을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조작된 민심, 위험한 민심도 있는

법이니 단면적으로 봤을 때 민중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요지다.

역사인식의 한 관점에서는 수긍할 수 있는 말이지만 최근 국민에 대한

‘과감한 거역’을 표방하며 민심을 재 정의하는 듯한 대통령 노무현의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다. 이게 그녀의 뛰어난 지적논리에 앞서 뇌리에 뿌리

박혀 있는 말인가 보다. 이 말은 억압적인 봉건주의의 군주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의

권면을 주기 위한 말이다. 노대통령은 억압적이지도, 봉건적인 사고도 없는 사람이다.

 

정신분석학은 ‘환자는 항상 옳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의식 수준에서는

엉뚱하고

비논리적인 환자의 말이나 행동들도 무의식 수준에서는 그 사람의 핵심동기를

드러내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나타난 말만으로

헛소리라고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마케팅에서 말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민심과 예를 든 정신과 환자와의 연관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뜬금없는 비유는

그녀의 전공에서

얻은 지식을 그냥 말해 보려는 것 같다. 하물며 정신병자도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논리적이며, 일관성 있는 노대통령의 참모습은 왜 보이지 않는

것 일까?

 

시장에서 말하는 고객만족은 지극히 의식적 수준의 개념인데 반해

정신분석학은 철저하게 대상의 무의식 차원에 주목한다. 의도를 가진

특정집단이나 개인에 대해서는 명징한 의식의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봐야 하지만 민심이란 본질적으로 민중의 무의식이 투사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민심은 언제나 옳다, 고 나는 생각한다.

민중의 무의식은 항상 옳지는 않았다. 히틀러 혼자서 수 백 만 명의 유태인을 죽인

것이 아니다. 인류역사상 모든 전쟁은 민중이 치룬 것이다. 민중의 무의식 속에 있는

폭력성을 잘 이용한 것이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국가라는 배의 방향타이다. 민중은 그 방향대로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매한 민중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억압도 하지 않고,

전쟁을 조장하지 않는 지도자에게 극열하게 반대하는 집단이 나온 것이다.

이 부분에 주목을 해야 한다. 정신과의사에게 진정한 역사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오래 동안 심각한 왜곡의 역사를 살아 온 민중의 정신병적 사고가

왜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그런 사회에서 온전히 살아왔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노략질을 못보고

해적선에서 태어난 아이는 해적들이 그동안 강탈한 물건을 팔고 다닐 때는 자신이

타고 있는 배가 해적선이 아니고 무역선으로 안다.

 

‘민심과 동떨어진 대통령‘이란 비판에 대한 노대통령의 반응은 ‘알고 있지만

거역할 수밖에 없다’이다. 요즘 들어 빈번하게 ‘내가 국민의 여론과 동떨어진

느낌’이라거나 ‘뜬금없다고 느낄 것이다’는 식의 표현을 쏟아내면서 대통령

자신과 국민사이의 ‘생각의 괴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네가 좋아’라고 말할 때 사람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무한대에 가깝다. 마주치기만 해도 머리칼이 쭈빗거릴 만큼 맹렬한

사랑의 감정이 있음에도 표현상으로는  ‘나는 네가 좋아’정도로 그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향해 ‘네가 나를 약간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이라고

말하면 듣는 이는 절망스럽다. 알고는 있지만 실체적 진실과 정도의 차이가

심하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과 같다.

  실제적인 진실을 예를 들어서 노대통령이 민심을 잘 읽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인데,

진실은 진리를 바탕에 두어야 가치가 있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진실은

사실여부이며, 진리는 진실을 뛰어 넘는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민심은 길들여 온 권위주의 탈피와 언론의 왜곡된 보도, 죄의식 없이

저질러진 기득권에게 그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일반인들은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다. 기득권은 남에게 자기부정을 당하는 현상에서 오는 강력한 지기방어 상태이다.

 

내가 보기에 노대통령의 ‘잘 알고 있다’는 인식은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지 진짜 민심을 알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다.

나는 대통령 노무현의

진정성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민심을 정확하게 읽는

일과 진정성은 별개다. 소신과 배짱을 굽히지 않아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그런

개인적 성공경험 이 어떤 경우에도 적용되는 만능의 법칙일 수는 없다.

노무현대통령의 진정성은 인정하면서 방법론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앞서

노대통령의 진정성을 알아주지 못한 국민들에 대한 답답함을 넘어서 억울함이나

분노는 스스로 해결하라는 말이다. 남자를 안다고는 하지만 정혜신은 역시 남자의

힘에 의존하는 여자이다.

원칙이 바로선 진정성을 관철시키는 방법 중에 소신과 배짱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묻고 싶다. 노대통령은 자신에게 욕을 해대고 왜곡된 보도를 하여도 그냥 가만히 있다.

이는 자신에게 돌아 올 더 큰 반발을 잠재우려는 고도한 정치 술과 자기절제 방법이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자신의 진정성을 왜곡 당하면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단번에 야수로 변한다.

 

민심과 동떨어진 대통령이란 비판에 대해 ‘역사적 책무’같은 비장한 맨트로만

대응할 게 아니라 혹시 내 인식이나 사실판단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심사숙고해 청한다. 노대통령의 자기인식은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인 노무현의 ‘선구자적 모습’

무게중심을 두고 있지만 지금 국민들의 눈에 비친 노대통령은 선구자가 아닌

계몽군주에 가깝다.

민심이라고 하지만 원래 반대자의 목소리가 높은 법이며,  그들은 힘이 있는 자들이다.

민중은 참을 수 있을 때 까지 소리 없는 방관자이다.

역사상 선구자는 기존 사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선구자가 나오면 항상

시끄러웠다. 시끄러움 때문에 자신의 오류가 있는지 살피라는 것은 정신과의사가 아닌,

생각 없는 동네 아낙네의 수준이다. 권력자는 통치에 앞서 가르쳐야 한다. 지적인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웃기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래야 맞는 일이다.

한 집안의 가장도 소리를 지르기

전에 논리적인 가르침이 앞서야 한다.

비유이긴 하지만 군주라는 말은 노대통령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이런 것에

더 시비를 걸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조중동의 영향 때문이라 할까봐 그만 둔다.

 

특정사안과 관련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더 많은 고민을 한 대통령의 눈에는

자신과 현격한 견해차를 보이는 국민들의 반응이 어리석은 감정적 대응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의 무의식은 언제나 옳다.

그녀는 자신의 칼럼에서 참여정부가 혹독하게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고 했다.

바로 위와 같은 경우라고 본다. 우리가 사용하는 국민은 뜻은 다양 할 뿐 아니라 특히

정치인들은 자기 멋대로 갔다 붙이기 일쑤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민을 대다수의

일반 서민이라고 전제한다면, 그들의 무의식에 심각한 병리적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물론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억압과 굴욕, 불의와 방관, 권위주의와 패배주의로 점철된 역사를 살아오며 쌓인

억울함이 그득한 것이 오늘날의 우리 국민들이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두 아들 아빠

 

소결

정혜신씨는 날카로운 분석으로 이 세상의 마초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그 중에

하나가 나 다. 하지만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이글에서 그녀의 날카로운 지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정신병적 성향이 전혀 없는 사람을, 더구나  시대 의식을 앞서가는 사람을

그녀가 담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