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제 멋대로의 해석, 믿음이 자라지 않는 사람

두 아들 아빠 2007. 1. 26. 18:34
 

제 멋대로의 해석

기독교에 대하여 이질감을 갖게 되는 이유 중에 그들만의 성을 구축하고, 남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로써의 자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이유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제 멋대로 해석해서 이상한 심성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믿음 생활을 하다가 삶의 어려움에 봉착하면, 자신의 정욕이나 욕심과 무지에 대한 반성과 통찰을 하기 보다는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머리가 좋다는 사람들이 이를 더 잘한다. 그저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아무거나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말한다.


남들도 다 당하는 어려움을 신앙인이라고 피해가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죄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 이를 듣고 예수께서는 거룩하다고 자칭하는 예루살렘의 너희들 보다 죽은 자가 더 죄가 있느냐고 반문하셨다.

이는 살아 있어서도 죽은 자가 많다는 뜻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의 시련과 시험을 당 했을 때 인식이 다르다.

우선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본다. 잘못이 전혀 없거나, 알 수 없으면 지금 까지 이유 없이 온전한 삶을 이끌어 주심을 깊이 감사한다. 다음에 내게 주신 시험에서 무엇을 요구받고, 깨달아야 하는가를 살핀다. 이런 실력을 쌓아가는 일이 신앙생활의 일부다.


성경을 함부로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특정한 구절에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감동받고 외우고 다니는 일을, 전적으로 잘못된다고 말 할 수 없으나, 믿음에 심각한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무거운 짐을 진 자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다.(마태복음 11장 28절)


세상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듣기에 아주 솔깃한 말씀이다. 이는 앞뒤 구절을 잘라먹고

내갈긴 말이다. 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장 29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30절)


배우라고 하신다. 그런데 뭘 배우는지도 모른다.

성경은 한 구절이 독립적이지 않은 것이 많다. 목회자는 이를 잘 풀이하는 전문가다.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잘 가르쳐주지 않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몰라서고, 둘째는 이를 제대로 가르치면 지금하고 있는 굿판 같은 짓을 당장 걷어 치워야하기 때문이다. 모르고 판을 벌린 자도 죄악 된 자이지만, 알고도 그런 짓을 하면

그 죄의 대가는 심각하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사람

교회에 출교한지 1~3년간은 아주 신나는(?) 신앙생활을 한다. 그 이후로 10년이 넘어도 똑 같다. 오히려 처음의 진한 감동은 어디 갔는지 자취를 감취고 영 무덤덤하다. 이를 애써 짜내는 일이 큰 소리를 지르고, 마치 발광을 하듯이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좀 시원하기는 하다. 오래 다니면 교회에서 직분은 받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실제 삶 속에서 증거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잘못 된 믿음의 길로 가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새벽기도에 참석해서 예배당의 구석진 곳에서 울고 불며 통성기도를 하는 집사는 분명 삶 속에 어려움을 당한 경우다. 잘 먹고 잘살 때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의 방향이 이상한 쪽으로 흐른 신앙인들의 일률적인 패턴은 어려우면 울고불고 하다가 좀 상황이 나아지면 바로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이는 믿음 준 결과라고 하며, 성령 받았다고 한다. 참 신기 한 일은 이 짓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는 일이다.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 때마다 하는 말이 똑 같다. 그긴 세월 동안 믿음이 단 한치도 자라지 못한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똑 같은 잘못과 실수를 계속 반복하며 같은 잘못을 비는 것과 같다.


믿음에는 정체란 있을 수 없다. 믿음은 자라지 않으면 퇴보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별 상관없다. 하지만 자녀가 있어서 그들도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 자신의 허접함은 자녀에게 소리를 더 크게 지르는 것으로 때워야 한다.

 

유치원을 십년 다니면 선생님과도 친하고 유치원의 모든 행사에 능하며, 그 안에서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생활한다. 새로 들어온 유치원생이 귀엽기까지 하다. 오늘날 교회에 그런 자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