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우리에게 공분이 있는가?

두 아들 아빠 2007. 4. 2. 09:23
분노(忿怒)는 인간만이 갖는 것으로 이성과 감정이 함께 담겨 있다.


짐승은 생존을 위함과 먹이 감을 취할 때의 감정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당한 분노는 없었고 짐승 같은 감정만이 팽배했다.


분노는 공분(公怒)과 사분(私怒) 두 가지가 있다.


공분은 고도의 이성적인 판단과 참여 의식이 요구 되며, 사분은 사사로운 감정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사분이 판치는 세상이었다.


사소한 접촉사고로 대로상에서 서로 멱살을 잡거나, 자신이 가장 사랑해야 할 가족에게 이유 없이 광분(狂怒)을 하는 짓은 마땅히 쏟아 내야야 할 공분이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공분이 억압당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과거 우리 사회가 그랬다.

소통과 논쟁을 거세당하고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의와 선은 바로 설 수 없었다.


비판은 애정이 있어야 하고 비난은 불방망이를 던지는 것이다. 비판이 없으면 균형감을 잃고, 비난이 없으면 악의 무리가 판을 친다.


역사적으로 독재자들은 사분을 공분으로 분갑 시켜서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 오는데 이용했다. 히틀러, 모택동, 스탈린 등이 이런 자들이다.


반대로, 시작은 공분으로 했는데 사분으로 변질되는 예도 있다. ‘때려잡자 공산당’이다.

자신들에게 반대을 하는 지식인을 공산당으로 몰아서 때려잡은 것이다. 인혁당 사건은 친일반민족반역세력이 이를 이용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정죄는 하나님의 몫이며 인간은 용서를 해야 한다고 했다.

구약에서 최고의 믿음 있는 자인 모세와 신약 시대를 연 성자 예수는 세상에 대하여 엄청난 분노 심을 보인 적이 있다.


불의와 악에 대하여 분노를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 있으면 이를 억제 당했다. 분노 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삶의 전반에는 굴욕이 깔려 있다.


굴욕적인 삶은 수치인데 이런 구도에서 오래 살다보면 창피함 마저 모르게 된다.

그래서 싸울 이유도 아닌데 멱살을 잡고 욕지거리를 한다.


(일전에 내 글에 대한 댓글의 반응을 보면서 공분과 사분, 비난과 비판을 구분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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