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영화 300’을 보고

두 아들 아빠 2007. 4. 3. 12:49
FTA 협상에서 스크린 퀴터 국내영화 배정일이 현행 73일로 고정 되었다. 안성기를 비롯해서 국내 영화 관계자는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 날짜를 고수한 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세계화에 역행을 하는 이 같은 반대 행위는 국내 영화를 국가의 보호 아래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간섭은 받지 않고 유익은 따먹겠다는 이중적인 생각이다.


‘영화 300’을 보고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원작이 만화라고 하지만 허리우드의 불록버스터와 홍콩 영화에 코메디까지 섞어 넣은 한마디로 잡탕, 저질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정찰대로 나선 300명의 전사들이 다수의 페르시아 군대를 만나서 용감히 싸우다 전멸을 한 작은 역사적 사건을 아주 큰 사건처럼 꾸며서 영화화한 것이다.


문명적인 페르시아를 야만으로 표현하고, 문명 속에서 가장 야만적인 스파르타를 호도하는 것을 보고 역사의 왜곡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파르타의 왕이 전쟁을 결심하는 과정은 페르시아의 사신을 죽이는 것으로 비롯되는데 왕비의 윤허를 눈빛으로 받고 한다. 가장 야만적인 무리들을 오늘날의 최고의 페미니스트로 분갑 시키고 있다.


혹자는 소멸한 현대 남성의 야성을 불러일으킨 영화라고 하지만, 이 영화의 잔인함을 보면서 인류가 왜 총을 개발 했는가를 알았다. 부상당해 누어있는 적군을 창과 칼로 다시 찌르는 모습은 그 당시에는 고통을 덜어 주는 최대한의 자비였다.


스파르타장군의 아들이 페르시아 군에게 목리 잘려 죽었을 때 아버지인 장군의 울부짖음은 차라리 코메디였다.

스파르타는 아들을 전사로 키우기 위해서 병약한 자식은 애초에 벼랑에 떨어트린다. 선별된 자라도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오늘날 같은 부정(父情)이 있을 수 없다.


스파르타가 왜 멸망했는지를 잘 보여준 면도 있다.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을 때 협상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무식하게도 계속 싸움을 했다.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 싸움뿐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스파르타 전사 모두가 외쳤지만 원래 직업이 전사라서 그렇다. 전략과 정치력이 없으면 나라와 민족은 멸망의 길을 걸어야 한다.


세계화는 역사의 큰 흐름이다. 이를 거역 할 수는 없다. 반대 대모에 힘을 쓸 것이 아니며, 이따위 조잡한 미국 영화에 주눅 들지 말고 우리 영화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