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활짝 열린 북악산(北岳山) 탐방기

두 아들 아빠 2007. 5. 7. 05:54

지난 5월5일 토요일 어린이날에 북악산에 갔다. 노무현대통령의 선거 공약이기도 한 북악산 개방은 그 의미가 크다. 한마디로 함축하라면 ‘두려울 것 없는 당당함’이다.

(초소와 막사등 군 시설물이 노출되지 않게 찍었다.)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돌고래 쉼터(300m) - 백악마루(1290m) - 청운대(430m) - 곡장(550m) - 촛대바위(240m) - 숙정문(460m) - 말 바위 전망대 쉼터(400m) - 성균관대학교(630m) 까지 총 4,300m 다.

 

(창의문 ‘彰義’ “올바른 것을 들어나게 하다.”라는 뜻)

 

(창의문 밖의 지형이 지네와 같다고 하여 천정에 닭의 형상을 그려 놓았다.)

 

(창의문 앞에서 바라 본 북악산 서측)

 

(창의문 안내소)

 

(인터넷 접수도 하지만 아래 양식에 의해서 현장에서도 접수를 받는다. 신분증 필 지참)

 

(창의문 안내소 뒤편에 있는 원형이 잘 보존된 ‘성가퀴’다.)

 

(구멍 세개 중에서 가운데는 45도 경사가 져서 근접한 적을, 양 쪽의 구멍은 원거리의 적을 대응하기 위하여 직선으로 되어있다.)

 

 

출발~

 

(멀리 우측에 북한산 정상이 보인다.)

 

(창의문에서 돌고래 쉼터까지는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있어 좀 힘들다.)

 

(우백호에 해당 되는 인왕산, 서울의 지세는 우백호가 좌청용인 낙산보다 월등이 커서 장남이 차남보다 잘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장자가 왕위를 제대로 물려 받은 적은 단 두번이라고 한다.)

 

(돌고래 쉼터에 잠시 쉬고...)

 

 

(백악마루에서 일행과 함께, 이분들 중에 현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하신 분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를 힘껏 외쳤다. )

 

(백악마루에서 내려다 본 서울 시내, 주산인 남산이 정면으로 보인다.수도 이전 반대하는 사람은 이런 서울에서 계속 살게 해야 한다.)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 사진 중앙에 성곽이 둥글에 나와 있는 곳은 '반원형 치'로써 적군이 침입하기 좋은 지역으로 방어에 유리하게 성을 쌓은 것이다.)

 

 

(1.21사태 소나무)

 

 

 (청운대 모습, 곳곳에 있는 군인들의 유니폼이 참 특히 하다. 검은 바지에 하얀색 상의에 파란 줄무늬가 있는 등산복 차림이다. 탐방객과 이질감이 없다. 이 유니폼을 선정한 분의 탁월한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청운대에서 곡장가는 길)

 

(곡장으로 오르는 길)

 

(때 이른 단풍나무?)

 

(곡장에서 바라 본 백악정상으로 이어진 성곽)

 

 

(전통적인 조선의 성곽과 왜색 석축의 조화?)

 

(촛대 바위 이곳은 백악산의 정수리에 해당하여 일제는 사진 중앙의 원에 쇠말뚝을 박아서 정기를 끊으려고 했다. 일제는 자기들은 믿지 않는 풍수지리를 한반도에서는 적용하는 것을 보면 참 집요한 족속이라고 생각한다. )

 

(요정 정치의 산실로 유명한 삼청각)

 

(촛대바위에서 숙정문으로 내려가는 길)

 

(숙정문)

 

 

(숙정문 안쪽)

 

 

 

(우리 조상의 소나무 처리 솜씨를 보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북악산의 소나무는 국가적으로 보존에 힘을 썼다. 500년 전에는 소나무의 굵기가 어떠했을까?)


 

 

 

(이런 길도 있다)

 

(말 바위 쉼터에 있던 안내판)

 

(청솔모 한 마리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말 바위 쉼터에서 마지막 길)

 

 

이 안내판이 정신을 확 들게 한다. 아마도 조상들 중에 한양 성을 쌓으러 한 번쯤은 오셨을 것이다.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서 성을 쌓지만 정작 써먹지 못한 것이다. 임금이 일찌감치 줄행랑을 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성과 국민들은 삽질시키고 왕이나 위정자들은 엉뚱한 짓을 한 것이다. 선조 이후 350년이 넘어서 이승만이 똑 같은 짓을 했다.

 

다른 점은 선조 임금은 북으로 튀었다면, 이승만은 남으로 튀면서 한강다리까지 끊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짓을 당 했는지 알 수 없다.


성곽은 오늘날의 진지와 같은 의미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처연함이 있다. 그런데 서울의 성곽은 조경 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연과 조화는 물론이고 방어 시설로서 손색이 없다.

 

우리 조상은 살벌한 군사시설조차도 운치와 멋을 부렸다는 생각이 맞을까?

아니면 현대전(戰)이 더욱 잔혹해서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