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취미

바이러스에 걸린 카리스마 이야기

두 아들 아빠 2008. 11. 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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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MBC 수,목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전면에 내세워 승부를

걸고 있지만 그 카리스마는 바이러스에 걸려 변질된 것이다.

 

극을 이끌어 가려면 주도적인 역할과 은밀하거나, 보조적인 역할이 함께 필요한데, 이들 둘이 극 중 내내 연관성을 유지하거나, 어느 한편에서 일정 기간 따로 활약하기도 하는데 결국엔 극의 흐름과 함께한다. 연속극 ‘베토벤 바이러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마에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든든한 지주로 세워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하고, 한편으로는 찌질한 군상을 시소의 반대편에 실어서 나름의 균형감을 이루면서 이야기 전개의 다양성과 자유로움을 확보했다.

 

  하나 같이 덜 떨어진, 오케스트라가 되고자 하는 군상들의 심리묘사와 그들의 흐트러진 모습을 마음껏 까발려 일반인들의 투사된 심리를 대리로 보여주기는 하지만, 예술의 세계를 다루었기에 친절하게도 시청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선까지 그어주고 있다. 그래서 극 중에서 강마에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 단원에게 ‘똥 덩어리’라고 했던 끔찍한 말도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는데, 보는 이들의 투사심리가 강마에의 카리스마와도 함께했기 때문이다. 자기도 저런 카리스마로 마음 것 내 지르고 싶은 소시민의 숨겨진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는데, 그 욕구의 본질은 잔인함이다.

 

  어줍지 않은 사랑 놀음은 리얼리즘을 최고치로 올려줄 뿐 아니라, 그동안의 관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새 관계를 짜는 이중효과를 불러 온다. 두루미와 강마에의 관계가 그런 것인데, 극중 반전을 위해서 사랑을 너절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전적이지만 삼각관계만큼 사람들을 자극하고 묘하게 흥분시키는 설정은 드물다. 강마에, 강건우 사이를 줏대 없이 오가는 두루미는 남성중심사회의 마초들이 억지로 그려내고, 바라는 여성상이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한 카리스마는 자기가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질러 댄다. 우리사회는 실력자는 그래도 된다며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는데, 그 안에 굴욕을 요구하는 심각함이 있다. 강마에의 카리스마는 ‘배려’란 없으며 자기 마음대로 지껄인 자의 내면세계를 그려내어 그 안에 고독이니, 뭐니 하면서 감정을 감성으로 덮어 버리는 짓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카리스마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신의 은총’으로 그 은총은 대가 없이 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의 관념은 전체적으로 공포심을 깔고, 조건적인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며 그런 관계에서 잘 해봐야 '노예들의 합창'이다. 베토벤 바이러스도 이런 근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사회에서 카리스마란 지배적 의미인 ‘억압’과 ‘굴욕’이 아니라 ‘배려’와 ‘존중’이다.

 

  극에는 이문열식의 엘리트주의와 영웅주의가 도도히 흐르고 있다. 이런 유는 언제나 그렇듯이 화학조미료 같은 리얼리즘을 가미하고 있다. 그래야 유치하지만, 유치하지 않게 보이며, 비현실을 현실감 있게 포장할 수 있다. 우리의 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공허한 서정주의’와 ‘이성은 찾을 수 없는 엘리트주의’, ‘마초적인 영웅주의’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합리주의적인 서양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서양에서 강마에 같은 인간은 사회성 제로인 정신병자로 보지, 그런 인격을 보고 감동하는 일은 없다.

 

  우리사회에 인문학만큼 생산적이지 못한 분야는 없다. 이런 구조가 오래되었기에 결국 스스로 위기가 왔다고 하는데, 정작 위기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인문학은 친일이라는 더러운 때를 아직도 벗지 못했다. 친일을 숨기고 거룩함으로 덧칠하기 위해서는 엘리트주의와 영웅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작가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극을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성세대와 떠오르는 신세대와 충돌을 비교적 균형감 있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선 소설류들의 감동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가 이문열식이 되었을 뿐이다.

 

  침묵의 연주회! 침묵은 권위자가 피치 못할 상황에서 쓰는 것이지 약자의 침묵은 굴욕이다. 과연 그 시장이 히틀러나 스탈린이었어도 4분 33초 동안 침묵의 연주를 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결론은 교향악단의 성공 신화로 끝낼 수밖에 없다. 이미 화해의 시도를 깔아 가고 있는데, 강마에의 노련함과 강건우의 천재성이 극적으로 빅딜해서 화려하고 큰 무대나, 대통령과 같은 최고의 권력자가 객석에 앉아 있는 연주회를 성공리에 마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서 누굴 죽이 던가...

 

  T.V 드라마에서 교훈적인 효과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감동을 쥐어 짜내기 위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혼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 정말 다행인 일은 강마에 식 카리스마를 우리의 중고생들이 열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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