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지율 스님의 천성산 터널공사 반대에 관하여

두 아들 아빠 2005. 7. 29. 10:24
   

 

 

전북 장수군 장수음 수분리 실고개 관통 도로

 

 

환경과 에코 페미니즘를 연결시킨 지율스님의 뜻을, 내 작은 머리로 헤아리기 어려워 여기에서는 환경론만 거론 하고자 합니다.

지율스님은 글에서 천성산 터널공사는 “우리사회의 다양한 집단의 이익과 가치관이 얽혀있는 아주 복잡한 사건” 이라 하며, 이 공사는 “자연을 파괴하고 산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행위” 라 규정짓고   “늪과 계곡의 지하수 고갈과 진동, 전자파로 인하여 사라져 버릴 위기에 있는 많은 생물들을 대표하여 도롱뇽을 원고로 자연의 권리소송 ”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개발 행위는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 이 문제라고 제기하고 있습니다.
“도롱뇽이라고 하는 작은 생명체에게 아직 관대하지 못하며.....” 인간이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하찮은 것들이 오히려 지구를 지키는 버팀목이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한 생명의 생멸은 지구 생태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 영향은 인간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이 반대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불교가 산마다 절을 지어서 일찌감치 환경파괴를 해놓고 무슨 소리냐는 일부의 핀잔은 애초부터 논쟁을 막는 행위입니다. 이런 구도로는 어느 누구도 세상의 잘못에 대해서 거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터널공사의 발주처인 한국도로공사는 당초 노선 설계시 종단과 지율스님이 수도하는 절과 협의를 하여 결정하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율스님이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종단과 이해 관계자들과 사전 교감과 승인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이런 후에 종단과 절의 큰스님들이 살피지 못한 것을 지율스님이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담보로 단식을 하는 지율스님에 대해서 소속 종단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그야말로 쌩뚱맞게 천주교의 최고 어른이 나서서 말린 것입니다.

단체가 소속원의 모든 걸 대표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 합니다. 그렇지만 뒤 늦게 라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하는데 뒷짐 지고 방관하는 종단의 처사를 이해 할 수 가 없습니다.

이번 사건은 자연을 지키자는 운동 이전에 거대종교단체를 소속 개인이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는 사회 변혁적 차원의 유익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주 : 목사님 의견 인용)

시민단체가 과거에는 여러 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침체기를 맞은 이유는, 전문가의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주장의 내용이 논리적이 못하고 학문적인 근거도 빈약하여 대중의 힘을 실지 못함이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초기의 시민단체는 대학의 전문 분야 교수들로부터 많은 조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 반대의 근거를 제공하라 하니, 기득권자의 한계를 벗어 날 수 없는 교수들도 점차 돈 안 되고 선전 효과 없는 그들과 관계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개발자의 입장에서 ‘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 해 주고 챙기는 짭짤한 부수입을 택하지 않았는가를 뒤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논리에 무기력 해진 환경단체를 제치고 지율 스님이 소승 구도의 길을 접고 대승의 뜻을 두고 산을 내려온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대안”이라는 최대의 걸림돌을 영적인 종교적 세계관과 여기에 자신의 목숨을 더해서 반대를 하니, 이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이어서 관련기관과 사회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계 당국은 초기 대응이 미흡하여 결국 사업 중단 이라는 개발자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입니다.

도로 공사 시 산을 가장 적게 파괴하는 방법은 우회하는 것 외에는 터널입니다. 다만 공사비가 엄청나게 비싸서 과거에는 터널보다는 산을 흉측 하게 깍 아서 길을 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을 우회하면 절대농지 아니면 묘지투성인 2~3부 능선으로 가야 합니다.)

이제는 지율스님 때문에 돈이 좀 있다고 함부로 터널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공사 대기 중인 모든 터널은 환경문제에 관하여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습니다.  
첨단산업에 가리워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의 육상 터널공사가 세계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에 관하여는 지극히 소홀했던 것 입니다. 공사로 인한 용수는 배수 처리만 생각을 했고, 진동은 터널에 미칠 지반의 활동을 염려한 계측만을 하였으며 작업 시 터널 내 공기 순환에만 신경을 쓴 것이 사실입니다.

터널은 산을 적게 파괴하려고만 한 것은 아닙니다. 도로의 경사도를 줄이기 위해서도 개발되었습니다. 예전의 영동고속로는 경사도가 심한 경우 10%가 넘었습니다. 이런 구간은 차량의 속도도 문제 이지만 이로 인해서 유류의 낭비와 엔진부하로 대기 오염이 많이 배출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새로 신설된 국도의 경우도 설계 때부터 4~5%(7~8도) 이내로 제한을 합니다. 따라서 어떤 구간에서는 필연적으로 터널을 뚫어야 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 온 허접한 ‘환경영향평가’는 접고, 토목환경공학 측면에서 사실상 완전 무시하고 있던 사항에 대하여 개발에 따른 환경 보전 방법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관련 학계가 연합하여 심도 있게 연구 할 수 있도록 하여야합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70%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산을 개발하거나 해안을 매립하지 않고는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가 없다는 것이 개발 주체들의 항변입니다.
물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서 댐을 쌓는 등 대형토목공사의 일체 행위에 관하여 “ 대규모 환경파과사업은 이 땅을 황폐한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라는 지율스님의 주장은 아직 많은 대중의 호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지구 생태계와 그의 보전을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진 자가 아니고 일개 비구니의 생각으로 규정짓고 조소를 보내는 것입니다.
또한 앞서 보아 온 환경보존과 개발이라는 대립구조에서  앞에서는 살펴 본대로 기존의 환경단체는 논리의 빈곤으로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생명의 생멸은 지구 생태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 영향은 인간에게도 미친다는”   지율스님은 어쩌면 겉으로는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면서 실상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적 해석이라 하면서 인간의 환경파괴의 종말이 지구자체는 존재하고 인간만 멸망당함은 모르겠으나, 과연 인간이 창조주의 의지를 무시하고 지구 전체를 완전히 멸망 시 킬 수가 있느냐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핵까지도 염려 할 필요가 없다고 낙관합니다.
어찌 보면 그럴 듯하지만 성경의 뜻을 잘못 이해한 괴변일 따름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신에 버금가게 창조되었으나 원죄의 뿌리는 깊고도 깊어서 모든 걸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 결과는 정작 일을 저지른 인간이 예측 할 수 없는 사태까지 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단은 아직 환경에 대하여 이렇다 할 의견을 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소수 의견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도 모르고 있다면 일반인은 전혀 모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온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을 인간의 원죄 이전과 이후를 망각한 것은 아닌 가 우려 됩니다.

반대의 이유가 겉으로는 환경을 우려한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금전적인 유익을 챙기려는 의도는 분명 사악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를 명확히 구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사업의 추진과 결말, 반대의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동일한 경우라고 볼 수 없지만 일전에 개통된 사패산 터널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노선 재검토를 요구하며 극열하게 반대하던 의정부사암연합회 소속 스님 20여 명이 개통식에 참석해 무사고를 기원 하였다고 하는데, 공단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공사로 인한 직, 간접은 피해를 경제적으로 보상한 결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가치 기준을 잘 먹고 잘사는 것에만 매 달여 온 결과, 모두가 눈앞에 다가온 멸망을 보지 못하는 집단적인 장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율스님은 경제논리를 앞세운 환경파괴와 영혼의 황폐를 염려하는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부디 세상 법정에서 승소(勝訴)하시어 승소(僧笑, 스님의 미소)하시길 바랍니다.


 

* 주 :아래는 지율스님의 원고 원문은 입니다.

초록의 공명과 에코 페미니즘

먼저 세계여성학 대회를 준비하여 주신 많은 분들과 대회에 참여의 창을 열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쉽게 만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상대를 보지 않고 버튼 하나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국제적인 만남을 통해 학술적 교우뿐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고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자연물이 지구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세계관과 윤리관 그리고 생명관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하기는 쉽지만 그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냐하는 것은 통일된 언어를 상정하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며 함께 궁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공약수는 인류가 진화하여 온 문화와 역사의 뿌리를 더듬어 내려가는 일이 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의 습관들은 우리선조들이 오랫동안 지구적인 관습에 순응하면서 적응되어왔던 것이며 이 자연의 순응은 인간에게 지혜와 선을 최상의 가치로 이해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은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모든 생명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이 지구적인 관습은 급격히 파괴되어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는 생각은 매우 고루하여 보이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에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으며 인류전체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는 환경문제에 실제 위험을 느끼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지금 저는 개발로 인하여 파괴되고 있는 천성산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늪과 계곡이 있는 산을 통과하는 16km의 터널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이 우리사회의 다양한 집단의 이익과 가치관이 얽혀있는 아주 복잡한 사건이기도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산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행위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 터널이 뚫릴 경우 늪과 계곡의 지하수 고갈과 진동, 전자파로 인하여 사라져 버릴 위기에 있는 많은 생물들을 대표하여 도롱뇽을 원고로 자연의 권리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현재는 41만 친구들이 소송대리인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소송은 한 생명의 생멸은 지구 생태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 영향은 인간에게도 미친다고 하는 단순한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소송을 통하여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 속에서 진행되어 온 개발과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금수강산이라고 불리웠던 아름다운 땅이 마르고 황폐하여 진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미래를 위해 보다 생태적인 생명관과 세계관을 열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이 운동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양서류의 32%가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하는 시점에서 도롱뇽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지구 환경 지표종이라 부르는 양서류의 32%가 사라져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환경 32%가 사라졌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하위 포식자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공룡의 멸종 원인처럼 생태계 전반에 걸친 큰 위험이 됩니다.

물론 고속철도 건설로 인해 생산 될 부가가치를 묵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멸종 위기에 처하여 있는 작은 도롱뇽 한 마리에 마음을 모을 때 우리의 생명에너지는 증폭되며 더 많은 창조적 부가가치들이 생겨납니다

자연의 권리 소송이라 부르는 도롱뇽 소송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아이들과 교사들입니다.
선생님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바로 이 소송이 미래세대의 소송으로, 문명이 만들어 놓은 길을 아무런 선택적 고뇌 없이 받아들여 밤거리에서 늦도록 방황하고, 날마다 전쟁과 살육의 뉴스를 들어야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리와 자연의 놀이터를 돌려주어야한다는 순수한 의도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회는 아직 도롱뇽이라고 하는 작은 생명체에게 아직 관대하지 못하며 이 문제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입니다.

저는 이 풀기 어려운 문제의 답이 아이를 기르는 어머님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환경운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생각을 자주하여 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음과 양(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역할과 조화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음을 땅이라고 하고 양을 하늘이라고 표현합니다.
양의 힘은 역동적으로 그 힘은 수직적이고 파괴적이나 그 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음의 힘은 텅비고 고요하며 넓고 평탄하고 따뜻하고 온화하고 평화롭고 균등합니다.
낳고 기르는 지구적이고 모성적인 본능은 여성적인 역할입니다.

저는 남성과 다른 관점으로 이 사회를 보는 것- 그자체가 여성의 힘이라고 생각하며
여성의 정치적 진출, 사회적 진출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얼마전 제주도에서 아토피 자녀를 둔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이 원인 모를 질병의 치료를 위해 오랫동안 그 원인을 연구했던 아이의 부모님들은 마침내 자신의 아이가 아픈 것은 지구의 아픔이 아이를 통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이 살아왔던 생활습관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경고에 이 아이의 보모님처럼 겸허하게 귀 기울여야합니다.
우리가 작은 생명에게 까지 마음을 회향 할 수 있을 때 개인적인 평화와 지구적인 평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최근 한 유치원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기 위해 청진기를 나무에 대고 나무가 수액을 빨아올리는 소리를 듣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때때로 저 역시 나무를 껴안고 교감을 나누는 버릇이 있습니다.
나무를 껴안고 있으면 거칠지만 따뜻한 나무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땅에 뿌리를 내리는 제 뿌리와 나무뿌리가 엉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우리가 이 땅에 뿌리 내린 같은 생명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무를 껴안고 눈을 감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작은 소리도 느낄 수 있으며 그 소리를 들으면 나는 바람이기도 하고 구름이기도하며 바위이기도하고 풀잎이기도합니다.
그러한 체험 속에서 바람소리 물소리가 깨달음의 소리라고 연관의 세계를 말씀하신 선인들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무엇인가 추구하는 대신 욕망을 버리고 조촐하게 살아가며 자연의 빛과 자연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황금의 가치 그 이상이며 최소한의 것을 누리고 최대한의 것을 이웃과 나누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최소한의 물질적 생활로 최대한의 영적 기쁨을 누리는 것은 신앙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安貧樂道, 小欲知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청빈한 사람에게는 고뇌가 없으며 순리를 이해하고 우주가 나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생사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면 경제라는 몽둥이를 들고 나오지만 빈곤의 직접적인 이유는 부의 균등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물질적 풍요는 빈부의 격차를 한없이 높이고 빈부의 계급사회는 많은 부조리를 안고 있습니다.

가진 자가 이사회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가난과 인권의 문제와 폭력, 반드시 전쟁의 문제를 발발합니다. 빈곤과 전쟁은 풍요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하여도 우리의 과학과 학문이 아무리 발전하고 진보하였다하여도 자연인으로 순리에 역행 할 때 우리의 에너지는 파괴적으로 돌변합니다.
더구나 자연 그 자체를 훼손하는 대규모 개발행위는 지구운명을 위협합니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는 언뜻 보기에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가지 가치관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듯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과는 가진 자들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싸움 일 뿐이었습니다.
국가가 주역이 되고 기업이 함께하고 언론이 그 중재 역활을 해줌으로 정당성을 얻게 해주는 수순을 거치면서 진행되는 도로, 터널, 댐, 방조제 등 대규모 환경파과사업은 이 땅을 황폐한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형 국책사업은 그곳에 터 잡고 살았던 생물 뿐아니라 지역민의 오랜 전통과 문화, 역사를 파괴합니다. 환경적인 위기와 도덕성의 위기는 같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의 사회상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풍요는 인간의 영혼을 고독하고 메마르고 병들게 하며 자연의 빛과 소리와 향기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의 영성과 근골은 점점 나약해지고 있습니다.

100일 단식 중에 제가 느낀 것은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에너지는 무한하다고하는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자연의 에너지는 결코 부족함이 없으며 이 에너지는 누구나에게 평등한 것으로 병들게 하거나 사고팔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혹자는 이제 먹고 살만 하니까 환경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환경을 이야기하는 시점은 과거로의 복귀가 불가능 해졌을 만큼 환경이 악화 되었다는 것이며 불과 50년 동안 지구 환경의 60%가 파괴되어 이제 지구 환경 시계가 3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는 시점으로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지구의 미래와 깊이 연관되어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은 개발이냐 보존이냐가 아니라 이제 더 이상 한발자국도 이대로 나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경고의 목소리에 대하여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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