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3일은 결혼 15주년 기념일 이었다.
대학 동창이자 중학교 동창인 친구가 22일 오후에 호출 메세지를 보내 왔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음날 출근하는 차안에서 알았다.
막히는 차안에서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마침 오늘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에 볼일이 있다고 해서, 그럼 끝나고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차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보니 점심 시간이 되어 근처에서 점심 먹으며 나눈 이야기가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서 근 일년간 집에 생활비를 변변히 갖다주지 못했다고 했다.
내게 돈 부탁을 하려보다 했는데 끝까지 하지 않았다.
친구는 집안에서 장남이었다. 남동생이 다음달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는데 형으로서 도와준 것도 없고 또 형이라고 사는 것이 이모양이니 면목이 없다고 했다.
작년에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의 저자는 방송국에 다니는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장남으로서 힘든 적도 있지만 슬기롭게 살아간 경우였다. 실제는 성공보다는 장남이라는 부담감 속에서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 친구가 그런 경우 였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친구에게 난 잔인하게 삶이 왜 어려워졌나를 집중 이야기 했다.
이제 그의 나이나 내 나이가 본질을 알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면서 허비 할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을 친구라면 내가 아무리 친해도 소용 없는 짓이다.
그도 장남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많은 부담감을 받고 자라왔었다.
그는 나와 전공도 같고 학교도 같으며 동일 업종에서 일을 해왔다. 성실하기로 말하자면
내가 그에게 견줄 수 없는 정도이다.
그런데 현재 삶은 다르다. 그 이유는 내 경우는 나를 지지해주고 인정하는 테두리 안에서
단계를 거쳐 왔으나 그는 결과적으로 한방을 노리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려고 했고
실제로 그런 테두리 속에서 살아 왔다.
빨리 성공해서 장남으로서 무언가를 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 조급함이 단계를 거치는 일은 답답한 일이고 비전이 없어 보였으리라! 그가 원하던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재는 자신의 핸드폰 요금도 체납되어 전화를 받기만 할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땅을 물려 받은 장남에게는 집안의 제 2의 책임자로 마땅히 부담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장남이라는 이유로 집안이나 동생들을 건사하라는 부담은 자식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점심 식사 후 자기 갈길을 가겠다는 친구를 배웅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모르는 번호로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그 친구 였다. 내 면전에서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공중전화로 얼마간의 돈을 빌려 달는 것이었다. 그 날이 금요일 이었는데 돌아오는 월요일에
주겠다고 한다. 우선 계좌번호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 사이 동전이 모자라서인지 몇 번의 전화가 왔다.
대부분의 봉급쟁이가 그렇 듯이 나는 모든 돈 관리를 아내에게 맡긴다. 집에 전화 해보고 다시 전화를 주마 했더니 오늘 꼭 필요한 돈이라고 했다. 아내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다. 되돌려 준다는 날짜가 너무 이른 것이 오히려 단 기간내에 돌려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도 솔직히 했다.
아내는 그러면 반만 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선한 일도 아내의 억울함 없이 하고 싶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남을 도우면서 자기 주변을 힘들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돌봄의 범위가 있다는 뜻이다.
그날 저녁에 결혼 기념일 이라고 좀 그럴듯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나나 아내나 서로 말없이 우리동네에 비교적 저렴한 식당에서 가장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날 식사값은 우리집안의 장남인 큰형님이 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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