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김성수
우리나라 근대의 경제, 언론, 정치, 교육, 문화 모두를 섭렵한 인물이다.
최근에 새롭게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힌 인물로 그의 평은 극과 극인,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입니다.
줄포 버스 터미널 앞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있는 인촌 김성수가 어렸을 적에 기거했던 집이 있습니다.
'문 전경'
대문과 담장이 넘 쌩뚱 맞습니다. 복원인지 리모델링인지~
김상만 생가(중요민속자료 제150호)가 있으며 1895년에 건축한 초가로 안채, 곡간채, 안 사랑채, 헛간채와 대장간까지 갖춘 10여동의 건물이 있다. 총 건평은 172평이며 안채, 안 사랑채는 우신각 지붕이고 헛간채와 곡간채는 맞배지붕이다. 지붕은 샛대로 이었다
대문을 들어 서서
아래사진 집은 1880년대에 인촌의 조부인 김요협과 양아버지 김기중, 친아버지인 김경중이 함께 모여 살면서 그 때 그 때 필요할 때마다 차례로 지은 건물로, 그의 일가가 의병운동과 화적들의 피해를 벗어나기 위해 1907년 헌병수비대가 설치되어 있던 줄포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다.
대대로 살아온 이런 집(아래)을 놔두고 줄포로 이사와 초가지붕을 언저서 살았다니 돈이 좋기는 좋은가 봅니다. 아님
화적때와 의병을 피해서...
(자료사진 입니다)
일제는 일찍이 줄포에 눈길을 돌려 수탈의 중심지로 삼았다.
구한말부터 이곳에 헌병대를 주둔시켜 의병의 습격으로부터 일인들을 보호하고, 미곡 무역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을 빼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객주들은 차츰 사라지고 1910년 합병 후부터는 일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바다를 매립하고 택지를 조성하여 경찰서, 식산은행, 줄포출장소, 우편국, 곡물검사소, 남선전기주식회사, 소방서 등의 기관을 들여앉혔으며 항만을 축조하였다. 이는 모두 일본의 공산품을 들여오고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 내가기 위한 조처였다.
김상만 집안은 고창에서 염전으로 벌어들인 재화로 땅을 사서 천석꾼이 되었고 줄포에서 미곡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이때 일제의 승인을 받으려면 상당한 협조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근간으로 동아일보 창간과 삼양사, 중앙학교, 보성전문(고려대 전신)등을 세우고 인수하였다.
전통적인 호남의 거부 집안이 식민지 체제와 근대 자본주의 생리를 잘 읽어 내어서 현재까지 성공을 이어온 아주 보기 드문 페밀리 입니다.
소금으로 빛을 보았지만 소금 처럼 살다 가지 못한...
곳간체
본체에서 대문 방향
친일파가 친일파를 위해서 지은 웃기는 시 하나 소개합니다.
인촌 선생님에게
미당서정주
동상 건립을 기념하며~
일본에 짓눌렸던 그 험한 36년과
해방 뒤의 어지럽던 혼란의 때를
이 겨레의 간절한 가슴팍이
되시고
이 겨레를 이끄는 스승이 되시고
이 겨레의 하고 싶은 말 도맡으셨던 입
또 이 겨레의 쉼없는 손발까지 되셨던
이여
이 겨레의 가장 가까운 님이시여
당신의 고향땅 여기 고창에
당신의 그 모습 본따서 모시어 세우나니
이 겨레와 함께 그
사랑 영원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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