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여성의 우울증 이야기 6. (억울함의 원천 ‘시댁’)

두 아들 아빠 2006. 9. 21. 12:10
 

시댁

 

내가 좋아하는(?) 여성분이 ‘시댁 마당의 공기와 밖에 공기는 다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오죽하면 시댁에 시달린 여성들은 금치도 먹지 않고, 집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할까!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관계성 중에 가장 크게 억압을 받는 것이 시댁식구이다.

과거 삶의 터전이 같은 농경사회에서의 유교적인 가족 연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이런 인식을 적용 시켜서는 안 된다.


연애시절 처음으로 남자의 집을 방문 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마냥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는 눈빛은 그렇다 치고, 시댁 어른 중에서 마땅치 않은 듯한 눈길은 머리 속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자 한 사람보고 왔는데, 그 뒤에 첩첩히 깔려있는 시댁의 권위에 눌리기 시작하는 것은 혼수장만부터 시작이다.

이제 막 혼인을 하여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어린 영혼을 억압하는 짓이다. 우리의 혼인은 독립적인 인격체간의 진정한 합체가 아니라 가문(집안)끼리의 대립이라고 생각한다.

 

부부가 마치 자기 가문을 대표에서 링에 오른 권투 선수들 같다. 그래서 상대 집안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잡으면 발광을 한다. 빛을 내는 發光이 아니라 미쳐서 날뛴다는 發狂이다. 부부싸움이 크게 되거나, 마음의 상처가 오래 남는 것이 이런 싸움이다.

그래서 서로의 집안에 대한 아킬레스는 건드리지 않기로 암묵적인 타협을 한다.

부부는 같은 나라이다.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새 가정을 이룬 부부는 각자 자신이 살아온 집안의 좋은 내력은 더 승화시키고, 좋지 못한 것은 가차 없이 비판하고, 내동댕이 쳐야한다. 상대의 잘못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안의 악행을 까발려야한다. 그래서 서로에게 경계를 삼도록 해야 한다.

부부가 진정 한 몸이라면 잘못된 것을 논하고 시정하자는데 자존심이 상 할 이유가 없다.


자식이 혼인을 하면 독립적인 한 가정으로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교제를 소원 할 뿐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이웃 사랑이 없는 이유는 부모가정과 자녀가정이 이웃 사랑의 표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다음 ‘사랑’에서 다시 논함)


성경의 창세기에는 이에 관한 명확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세기 2:24)

혼인에 관한 가르침인데 분명 남자에게 자신의 부모를 떠나라고 한다. 가정의 머리 되는 남자를 그 부모에게서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몇 대째 기독교 집안이라는 사람들조차 이를 지키지 않는다.


혼인한 자식을 자꾸 간섭하고, 자신의 권력 아래 매어 두려한다. 심지어는 돈으로 자식을 회유하고, 구속하려한다. 결혼한 자식이 아직 모자라서 걱정이 되어 그렇다면 온전한 인격체가 될 때가지 혼인을 미루고, 그 나이까지 하나님의 자녀를 온전하게 키우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엎드려 눈물로 속죄를 빌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효자가 많다. 유독 결혼 후에 효자를 자처하는 남자가 더욱 많다.

내가 한때 이 부류 이여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그동안 부모나 가족에게 못한 것을 사랑한다는 여자를 부려먹어서 갚으려고 하는 짓이다.

 

혼인 전인 여성들은 남자의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가정의 독립을 보장 받고, 결혼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영혼은 아무도 책임 질 수 없다.

요즈음은 장모가 사위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장모는 등 뒤에 언제든지 꺼낼 ‘이혼이라는 칼’을 항상 숨기고 있다. 관심이라는 가증으로 간섭을 통해서 칼을 뺄 명분만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아버지’가 있다고 기사에서 본적이 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것을 예전에 블로그에 혹독하게 비판 한 적이 있는데 변종된 시아버지가 나온 것이다.

오늘날의 시아버지는 집안에서 더 이상 권력자로 서지 못하여, 그저 약한 며느리를 상대로 구박하는 짓이다. 그러다 된통 당한다. 요즈음 젊은 여성을 잘 알지 못하는 세상모르고, 눈치 없는 퇴물 늙은이들이다.


중년의 여성들은 우여 곡절 끝에 시댁의 억압에서 벗어났거나, 벗어나는 중이다.

그렇지만 억압으로 인한 영혼의 상처는 남아 있다. 며느리 노릇을 다 하지 못한 죄책감도 만만치 않다. 효자와 효부 콤플렉스를 일으키는 우리사회는 모든 자녀를 죄인으로 몰고 가서 여성들의 우울증에 일조를 하고 있다.


우울증은 과거의 억압과 죄책감이 얼마나 과중한 가 따라서 증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에 관한 치유는 항우울제를 삼켜서 되는 일이 아니라 남편의 사랑이 훨씬 효과적이다. 아내에게 약을 먹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참 자유’를 주고 ‘사랑’을 떠 먹여야 한다.

그 복은 남편 자신이 고스란히 다 받는다.


삶 속에서 ‘용서’라는 것을 오해하며, 잊고 산다.

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관용이라 해야 맞다. 힘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 용서이다. 그래서 용서는 어려운 일이다. 성경에서는 사랑과 동격으로 용서를 요구한다.

 

구약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깊으라고 하였지만(이는 오늘날에도 이루어지지 않는 공정함이다.) 예수님은 용서의 그 끝을 두지 않으셨다. 오른뺨과 왼뺨, 속옷과 겉옷, 오(五)리와 십(十)리, 구하는 자에 주고 꾸려는 자에게 거절하지마라 ...

‘복음’은 많은 인간에게 열광 될 수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정작 용서를 빌어야 할, 있는 힘을 마음대로 쓴 자가 되레 용서를 요구하거나, 사과를 받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악한 자는 그 스스로가 무너진다며 인간의 복수심을 누르시고, 용서를 한다면 애통한자에게 복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끝없는 자유를 주시려는 분이다. 다만 인간의 완악함이 이를 거부 할 뿐이다.


당한 여성 스스로가 억압한 시댁식구를 진정으로 용서해야 한다.

내가 불쌍하다면 용서가 되지 않는다. 용서는 상대를 가엽게 여겨는 행위다.

점점 늙어가는 시부모를 보면서 불쌍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만든 불쌍함일까 아니면 시부모가 내게 주는 불쌍함일까?

용서는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을 위하는 일이다.

용서만큼 확실한 영혼의 참 자유는 없다.


-다음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