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우울증 이야기 7. (사랑)
사랑
성경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사랑’이라 한다.
여자는 ‘남자를 주장하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론 자신을 ‘강하게 이끌면서’ ‘지극히 사랑 해주기’를 바란다. 여자의 이 세 가지 욕망을 남자들이 다 읽어내고, 그 타이밍을 맞추기 어렵다. 그래서 여자들은 늘 불만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면 남자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어떤 목사가 주일 공예배 때 회중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러분 신혼의 애틋한 그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눈까지 지그시 감으면서 말이다. 목사가 회중에게 이렇게 말해서 성도의 의식이 자라기나 할까?
아니 십수 년 전의 사랑으로 어떻게 돌아간다는 말인가?
맨 앞줄에 백발이 성성한 노 장로들을 앞에서 할 말이 아니다.
그 사랑은 일생에 단 한번 느껴야 하는 에로스 사랑이다.
여성들은 혼인 전후의 연애 감정의 애틋한 사랑만을 뇌리에 기억하는데,
이는 사랑의 확장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T.V 연속극은 저녁시간 때 아줌마들을 불러 모아놓고 줄 창 초보사랑 타령을 하며, 시청률 경쟁을 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책 수준의 의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백마는 폐마(廢馬)되었고 왕자와 여인은 흰 머리칼을 날리는 중년이 되었다.
에로스 사랑은 파괴력이 있는 사랑이기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머리 속에 그 잔상이 오래도록 남을 수밖에 없다. 이게 다음 단계의 확장된 사랑으로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다. 열광적이지만 연약한 수준의 초보사랑이다. 이를 또 느끼려는 것은 불륜의 마음이다. 베테랑 운전자가 초보로 돌아가면 사고가 난다.
우울증은 사랑의 절대부족이다. 확장되고 연결이 되지 못함이 그 원인이다.
자녀 사랑
자녀가 없는 부부는 다음 단계의 사랑이 뭔지 모르고 살아간다. 이게 그들 삶의
어려움이다.
에로스의 강력한 사랑은 남남을 단번에 묶어주고, 그 사랑의 힘으로 난생처음 나와 네가 아닌 전혀 다른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하게 된다. 둘만의 사랑에서의 확장이다.
이게 바로 자녀 사랑이며, 이는 사랑의 승화 과정의 첫 단계이다. 여기에 여자가 더 적극적인 것은 사랑받은 자로서 배로 되돌려 주려하는 높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여서 숭고하다고 까지 말한다.
그러나 가정의 머리인 남편의 지지가 없으면, 억울함의 표출이지 온전한 자녀사랑은 어렵다.
남자는 30대에 경제적 생산 활동을 최고로 하고, 여자는 자녀 양육이 최대의 생산 활동이다. 둘 의 가치 중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를 중심으로 가정을 생각을 할 때, 둘의 노력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여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 자신도 다른 여자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가치를 올리지 못한다.
자존감을 갖고 인정받아야 할 것을 마땅히 받지 못한 억울함이 있는 것이다.
억울함이 쌓이면 자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고,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줄 '복수의 화신'으로 키우게 된다.
복수의 화신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혹여 자녀를 사랑한다며,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그런 것이 아닌 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의 자녀는 육신의 자녀이고, 이는 하늘이 내려 주신 것이며, 따라서
'내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지 않고 논하는 자녀교육은 허황된 짓이다.
모두가 자기 열심으로 키우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웠다는 책들은 이 말이 서두에 나오지 않으면 다 부모 자랑이다. 자신이 열심히 했다는 노력과 사랑이 언제든지 낙담과 분노로 변할지 모른다.
자녀를 자유롭게 키운다면서 방관에 가깝게 양육하는 부모는 여기에서 논하지 않겠다. 그들의 ‘편리한 운명주의’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
성경에는 '하라‘와 '하지마라'가 있다. ‘하지마라’는 강력한 계시고 ‘하라’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네 이웃을 사랑 하라' 하면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은 남을 억압하는 대로 발전하고 최악의 경우는 폭력과 살인도 저지른다.
사회 규범은 유지 차원에서 최악의 경우는 법으로 엄격히 다스린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못해도 합법적인 폭력과 살인을 저지른다. 이웃을 흉보고 무시하며 멸시하는 짓이다.
인간의 죄 된 습성 때문에 미움의 확장성은 사랑보다 강력하다.
사랑은 확장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한다.
수십 년 전의 에로스 사랑에 머물러있으면 자신도 어렵고 가정도 어렵게 한다.
오늘날 이웃 사랑이 있기는 한가?
아파트의 방화 현관문은 단절의 표상이다. 불길만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문을 닫는 순간 이웃과 완전 단절이다. 개인주의의 팽배로 자기 가정을 열어 보이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보여 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은커녕 아줌마들끼리 수다가 전부인 이웃과의 관계로 인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서로의 의식교류가 아니라 자랑과 한탄뿐이다.
이웃 사랑의 표상은?
인류 최초의 이웃은 분가한 자녀의 가정이다.
부모 밑에 있다가 혼인하여 독립한 ‘자녀 가정’과 ‘부모 가정’이 이웃으로 수평적으로 이루는 관계이어야 한다. 오늘날 진정한 이웃 사랑이 없는 것도 이웃의 올바른 표상이 없어서이다.
안부 전화를 하루 걸러서 꼭 해야 하고, 한주에 한번씩은 방문을 해야 효자, 효부인가? 부모가 먼저 하면 권위가 떨어지나?
예수님은 교회를 통하여 온전한 이웃 사랑을 이루게 하셨다. 그런데 그곳조차도 온전한 이웃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의 힘이 여과 없이 들어와서 쓸데없는 권위와 권력이 질서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의 장로의 아들이 이렇게 독백을 한 적이 있다.
‘교회에서 기독교가 유교를 단 한번도 이겨 본적이 없다.’ 사회의 관계와 교회 내의 관계가 차이가 없는 것은 같은 고백 중심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웃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교제와 권면이 단절된 가정은 바르게 설 수 없다.
그 안에 절대 권력자인 가장이 수십 년 동안 줄곧 올바르게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바쁘게 살아 올 때는 별문제가 없다. 중년 이후가 문제이다.
가장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식을 올리고, 잘못 되어가는 것을 바로 잡아가면서 살아야하는데 홀로 독재를 하고 있으니 그럴 여력이 없다.
가정은 이웃과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교회에 열어 놓아야한다. 그래서 수시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장 모임은 잘나가는 집안에서만 한다. 그곳에 갔다 와서 은혜는커녕 상처를 받는 성도가 더 많다.
이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보여 줄 것이 없어서이다.
집안 인테리어를 새로 해서 자랑하려 함은 모를까!
가정을 열어 놓지 않으면 가족들은 절대자의 억압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은 혼인을 ‘탈출’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모는 힘이 남아 있는 한 그냥 놔두지 않는다. 이런 악행을 끊지 않는 한 이웃사랑은 없다.
소결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노래해도 알 수 없는 것은 사랑이 어디에서 온지 몰라서이다.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 누구에게나 주신 최대의 선물이며, 나눔과 확장을 요구 하신다. 그래야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또 사랑을 달라고 울고불고한다.
사랑이 없으면 우울증이 오며, 그 뒤에는 억울함이 있고, 억울함은 사랑을 생성하는데 절대적인 걸림돌이다.
-다음은 남자의 죄성을 이야기 하려 했는데 ‘중년남자들의 우울증에 관하여’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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