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재미로 읽는 한양(서울)의 풍수지리

두 아들 아빠 2006. 11. 16. 15:15
 재미로 읽는 한양(서울)의 풍수지리

 

풍수지리는 산세와 물의 흐름이 전부이다. 한양은 서출동류(西出東流)의 청계천과 더불어

경복궁을 중심으로 4대 내산과 외산( )이 있는데, 북쪽에 주산인 북악산(북한산), 서측에 우백호 인왕산(덕양산), 동측에 좌청룡인 낙산(용마산), 안산에 해당되는 남산(관악산)이 남쪽에 있다.                         

                                       북한산(외주산)


                                        북악산(주산)                                                                                

                                            청 와 대    

                  인왕산(우백호)                       낙산(좌청룡)        용마산(외좌청룡) 

  덕양산(행주산성)                       

 (외우백호)                      청계천 (서출동류)

                                         

                                                  남산(안산)


                                            한     강

                                                    

                                                    관악산 (외안산)


이명박 전시장이 청계천 복개를 고가도로와 함께 뜯어 낸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자신이 이 나라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시장의 공약은 재임초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고, 물길 내기에 재미를 본 후로는 남한 전체의 배를 가르는 황당한 ‘경부 대운하’ 를 대선 공약으로 걸었다. 물길을 열어서 왕으로 나서려는 사람이다. 그분은 미신을 믿지 않는 교회의 장로라고 알고 있다.


유교를 통치와 생활의 근간으로 한 조선왕조 27대에서(태조~순종) 장자의 왕 계승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등 6명이며 이들 중에 초기에 왕권을 찬탈 당한 단종과 중간에 쫓겨 난 연산군을 제외하고, 왕위를 순탄하게 맡 친 왕은 문종, 인종, 현종, 숙종 등 단 네 명뿐이다.

그들 중에도 외동아들인 숙종과 재위 기간이 조선왕조에서 가장 짧아 8개월 밖에 되지 않았던 인종,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은 재위 기간인 2년8개월의 대부분을 병석에 있었다. 진정한 장자계승 중에 왕다운 왕은 효종의 맏아들인 현종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유교의 장자 계승 법은 엄격한 규율과 절대 권력을 가진 왕가에서도 지켜지지 못했다. 장자는 일찍부터 왕위를 이어받을 존재라서 끊임없는 시기와 모함을 받아서 그렇다는 설도 있으나 어찌되었건, 조선왕조 내내 장자가 왕위를 받지 못하여, 왕권에 대한 정통성 시비는 수많은 정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를 한양의 풍수지리설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인이 된 육관 손 석우씨다. 그는 ‘터’라는 자신이 쓴 책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 보다 좌청룡인 낙산(대학로 뒷산)이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서 그렇다. 그래서 왕가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서울의 사대문 안에 사는 사가의 장자들도 그리 잘된 일이 없다.’


청와대 터는 일제 총독의 관저이다. 이곳은 북악산 바로 아래 있는데 북악산이 워낙에 험준하고 나무가 별로 없어서 조선 건국 초기에 주산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연세대학의 뒷산인 안산을 주산 삼아서 왕궁을 짓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게 됐다면 지금의 연세대 터는 왕궁이 되었을 것이다. 그 넓은 학교 터에 건물이 빼꼭히 들어선 발전을 보면 왕궁의 터로써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연세대 신촌 캠퍼스 맴)

 

왕궁의 맨 앞에는 식민지통치 건물을 짓고, 뒤에는 총독의 관저를 지어서 조선왕조의 기를 완전히 꺾으려는 의도의 악날함을 떠나서, 당시에 풍수지리 가들은 청와대 터는 비운의 터라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그곳을 궁의 후원으로만 사용하였다.


청와대 터는 밖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안에 그리 넓은 터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가 어렵다.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아주 넒은 터를 보고 자만에 빠진다는 설이 있고, 청와대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운 듯한 북악산만 보인다.

여기를 거쳐 간 역대의 6명의 일본 총독이나, 건국 후에 현직 대통령을 제외한 8명의 대통령이 모두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 것도 다 그런 이유라고 설명 한다. 믿거나 말거나~


 

(다음카페 ‘입암 사람들’ 글 인용)


청와대가 지어진 것은 1927년 제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때였다.


그의 서울 도착은 강우규 열사에 의하여 피로써 막을 연다.


이후 조선 총독을 한 번 더 한 그는 1932년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자신보다


더 파쇼적인 젊은 장교들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만다.


청와대의 첫 거주자가 피로 시작하여 피로 끝냈다.



사이토의 뒤를 이은 제4대 총독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는


군 장교 시절부터 돈을 좋아해 '배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소위 야마나시 총독 독직사건에서 5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입건,


구속되었다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6대 우가키 가즈시게 (宇垣一成) 는 2차대전이 끝난 후


공직추방령에 의하여 1953년까지 은퇴했다가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병으로 의정활동도 못하고 사망.



7대 미나미 지로 (南次郞) 는 2차 대전 후


전범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고 수감,


1954년 질병 때문에 풀려났으나 다음해 병석에서 사망.



8대 구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는 연합군의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지목, 1948년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옥사.



마지막 9대 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 는 미군 하지 중장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는 수모를 겪은 후에,


일본인들의 귀환을 뒤로 하고 자신의 아내와 손자 두 명을 데리고


부산에서 짐을 가득 실은 80t짜리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폭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물건을 다 버린 뒤 부산으로 되돌아오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은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임기를 다 하지 못하고 중간에

좇겨난 윤보선과 , 스스로 그만둔 최규하 대통령은 별탈없이 천수를 다 했다.


한 나라의 왕이 기거 하는 왕궁 바로 앞에 식민지 통치 건물(총독부)을 지은 예는 세계 역사상 유일무일 하다. 건물의 규모와 총독의 지위로 보아서 중국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한 것이다. 일제는 명산마다 쇠말뚝을 박는 둥, 자신들도 따르지 않는 풍수지리를 한반도에는 적극적으로 적용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서대문형무소(구 경성감옥)의 위치 선정이다.

 예전에 연세대 뒷산인 안산 정상에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상단 중앙의 고가 밑에 작게 독립문이 보이고, 우측에 서대문교도소와 좌측에 운동장이 있는 군부대가 보인다. 교도소의 폭동 진압과 유사시를 대비하여 전차 1개 중대와 보병 1개 대대가 주둔한다. 현재 교도소는 이전 했으나 군부대는 그대로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 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사형이 집행된 장소이다.                  

 

일제시대 철권정치를 휘두르던 제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는 안산과 인왕산으로 막혔다는 지정학적 요소 외에, 애국지사들에게 자괴감을 심어주기 위해 독립문이 경성감옥 정문처럼 보이도록 배치한 데서 연유되었다고 하는데, 원래 위치가 현재에서 남동쪽으로 70m나 떨어져 있음을 감안 할 때 연관이 없는 말이다. 그보다도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과 그 앞에 일제의 지원 하에 만든 독립문 옆에 감옥을 만들어서 우리의 기를 꺾으려고 한 것 같다.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에 지어 1987년까지 80년간 운영했다.

 


(서대문에서 무악재 방향)

 

독립문의 앞 뒤 한글과 한문 글씨는 이완용이 쓴 것이고, 이를 건립 할 때, 나중에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승만도 명단에 끼어있다. 러일 전쟁 승리 후에는 한반도에서 ‘독립’이라는 단어는 금칙어가 되었다. 당시에 독립은 중국으로부터의 탈피를 일본이 지지한 것이지 한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사신을 맞이 하던 영은문(아래 사진) 우측 산이 안산이다. 현재는 주초만 독립문 앞에 남아 있다.

 

인왕산과 안산의 사이를 무악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서울로 들어 올 수 있는 북쪽의 유일한 통로였다. 지명의 이름은 무악대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인왕산은 제한적이가는 하지만  개방을 했다.

(인왕산과 무악재)

안산의 외산에 해당되는 관악산은 불의 기운이 너무 쌔서 해태 상을 세워 막았으나, 북쪽 사면에 국립 서울대학교가 들어서면서 관악산의 불기운을 더하여 청와대를 뒤 덮은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

 

용산은 예로부터 외국군의 주둔지로 사용되어 왔다. 최초 고려 때 몽골군이 점령지로 사용하던 것을 청나라 군과 일본군에 이어서 미군이 최종적으로 주둔지로 사용하고 있다.

한강을 이용하여 진입과 운송이 편리하며, 퇴로를 확보하기 좋고, 남산을 점령하면 한양을 쉽게 함락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서울 한복판에 대일본(大日本)이라는 문양을 새겨 넣었다는 의심을 받아 왔다. 북악산이 大자 형상이고(혹자는 경복궁 내에 大자에 해당되는 건물을 지었다가 헐었다고 함), 총독부는 日자형 건물이며, 서울시청 건물이 本자에 해당된다는 설이다. 믿거나 말거나~

서울시청(경성부청)을 조선의 황제가 거처 하는 덕수궁 바로 옆에다 황궁 안이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위압적인 규모로 지은 것은 결코 좋게만 볼 수 없다.


현재 대학가로 각광을 받는 신촌은 광흥창이라는 고려말기부터 조선조까지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의 녹봉을 관장하던 관청이 있었다. 엄청난 상권이 형성된 현재의 신촌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의 개념으로 조선시대에는 청계천 다리를 건너면 강남이었다. 오늘날 같이 서울이 한강을 끼고 있었던 도시가 아니었다. 한강은 남쪽으로부터 외적의 공격을 막는 역할을 하는 일종에 장애물이나 해상 운송로였다. 남산골 한옥마을이 조선시대에는 강남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한강 이남인 강남의 개발로 서울의 풍수지리는 일약 대변혁을 하게 되었다. 청계천이 복개 되면서 바로 강남 개발로 이어졌다. 서출동류의 청계천은 그 운명을 다하고, 한강이 그 역할을 이어 받았다. 강남개발과 더불어 한국은 경제적 기적을 이루었고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세계가 불렀다.

한양의 전통적인 부자들은 종로의 팔판동과 관철동을 주변으로 있었고, 해방이후 성북동과, 한남동, 북쪽의 평창동에 모여 살았다.

(강남 타워 펠리스 야경, 사진도 명품답게 액자에 있다.)

눈에 보이는 이 화려함을 누가 거부 할 수 있을까?

강남은 산업화 신흥부자들의 시대를 열었다. 강남은 노대통령도 인정한 명품(?) 지역이다. 강남의 영욕은 한국 산업화의 역사이자, 부동산 투기의 대표주자이다. 이들은 수도이전을 극열하게 반대한다. 왜냐하면 20년도 넘은 낡은 아파트 한 채가 10억이 넘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유럽 영주의 성을 사고도 남는다고 한다.


강남의 요지인 압구정동은 세조의 부당한 왕권침탈을 돕고, 예종과 성종에게 자신의 딸을 비로 삼아서 무소불의의 권력을 휘두른 한명회 자신의 호를 붙여서 지은 정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 정자에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한다는 미명으로 연일 술잔치와 풍악이 울려 퍼졌는데, 현재 강남에 산다고 잘 못 일수는 없지만, 옛날 유래를 더듬어 볼 때 썩 개운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말이 있다. 강남의 요지는 거의가 모래 위에 있다.

 

이들은 국토의 균형발전에 역행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강남 해체의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도 강남에 살아서 관습법을 들먹이며, 수도이전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우리나라가 성문법을 따르지 않고, 관습법도 수용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예전에 법을 가르친 선생님은 전부 거짓말장이 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