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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이문열의 정신세계

두 아들 아빠 2006. 12. 7. 16:43
똑똑한 이문열의 정신세계

 

미국에 체류 중인 작가 이문열(57.사진)씨가 386 운동권과 현 정부의 실정을 맹렬히 비판하는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 제목은 '호모 엑세쿠탄스'. 이다.


소설 속에 '삼치회(三癡會)는 세 종류의 구제받기 어려운 바보(三癡)들이 모였다는 뜻이지. 안기부 대북 파트, 검찰 시국공안, 그리고 경찰 대공분실 간부로 옷 벗은 사람들…. 조국과 민족을 위한답시고 못된 짓만 한 얼간이들, 아니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을 주도한 뒤에도 국민을 학살하고 착취한 것으로 일관한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 대한민국에 빌붙어 감히 위대한 지도자 수령 동지께 맞서 온 …' (중앙일보 기사 인용).


자신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소개해주는 대신에 현 정부를 까는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문열씨는 이제 얼빠진 사람이다. 30년 전에 ‘오적’(五賊) 이라는 글을 쓴 김지하 시인를 카피하는 짓을 하고 있다.

 

독재시절에는 단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가 원님가고 나발을 불고 있다. 김지하 시인의 글이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보다.

정신분열증 증세가 보이는 이 소설이 그의 마지막 글이 되었으면 한다.


이문열은 누구인가?

안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 사범대를 각각 중퇴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이도 그만 두었다.창작물의 판매부수가 1,000만권이 넘고 100억의 인세를 받았다고 스스로 당당히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 중에 이 사람의 소설을 안 읽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다.

 

가히 ‘국민소설가’ 라고해도 무리가 없다. 과연 그럴까?

아래 글에서 단 한번도 이문열을 ‘작가’라 하지 않고, 그의 글을‘작품’이라고 하지 않았다. 소설과 글이라고만 한 이유는 이문열에 대한 나의 작지만 철저한 저항이다.


소설소개

1977년 대구에 있는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나자레를 아십니까’가의 입선으로 시작하여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당선되면서 일약 중앙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대표작으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레테의 연가'‘이문열의 삼국지’가 있으며 그 외에도 ‘변경’‘사람의 아들'‘구로 아리랑’‘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등등 수많은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이어져왔다.


이문열의 인격형성

그의 인격은 한마디로 공산당과 교회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사람이다. 소설 속에 이를 잘 이용하여 ‘국민소설가’라는 반열에 자신을 올려놓았다.


그의 아버지는 자진월북한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당시에 가족을 버리고, 고향을 등지며 이데올로기를 따라서 북으로 간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전도 순례를 가는 것 같은 상당히 종교적인 행위이다.

 

공산주의가 절대 성공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인간이 신을 흉내 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사상이 아니다. 단지 먹고사니즘 일뿐이다.

그의 똑똑함은 이 두 집단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월북 후 남은 가족들은 출생지인 서울을 떠나서 잠시 어머니의 고향인 경북 영천과 아버지의 고향인 영양을 떠돌아 다녔다.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이 종교이어서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의 월북으로 그는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이를 성경을 통하여 훌륭하게 승화(?)시킨 사람이다. 그의 우 편향적인 사고는 아버지의 영향이다. 그래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보수수구 언론들이 그에게 쏟는 애정은 남다르다.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버리고 반공주의자가 되어, 노골적인 반 페미니즘과 남성우월주의에 엘리트주의까지 포장한 그가 자신들의 입맛에 딱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후 소설 속에 면면히 흐르는 영웅주의는 보수꼴통들이 열광하기에 딱 알맞다.


원수의 집안에 똑똑한 폐륜아를 잘 키워서 그 원수를 대적하는데 이용하고 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문열은 똑똑하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이용하여 원수의 집안에 칭찬받는 방법을 일직이 터득한 영악한 아이이다.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소설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소설 속에서의 세계관

1987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어린아이들을 소재로 한 심리 소설인‘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칭찬받을 만하다. 아이들의 심리 속에서 어두운 시대를 함께 담아냈기 때문이다.


소설속의 주인공이 독자로 하여금 대리 만족을 시키는 아주 얕은 수준의 묘사에도 크게 감동을 하는 우리들이다.

모든 소설이 그렇듯이 소설 안에 문약한 작가 자신도 집어넣었다. 엄석대가 박정희와 전두환에 비유한 독재자라면 자신은 서울에서 전학 온 한병태 이며 약간 의로운 소시민이다. 그는 엄석대의 권위에 도전했던 유일한 인물로 묘사 되지만 실제 그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오히려 엄석대 밑에서 신음하다가 엄석대와 일체한 많은 아이들 중에 하나로 살아오다가이제 와서 엄석대(독재 정권)와 한병태(386운동권)까지 싸잡아서 욕을 하고 있다.


어린 이문열은 이미 권력의 무상함과 권력부 주변에 기생하는 기회주의자들의 추악한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대통령 선거철만 되면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그를 보면서 나는 생각이다.

엄석대의 왕국을 일시에 붕괴시키는 담임선생님은 그는 누구라고 생각할까?

아마도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라고 생각 할 것이다.

이문열은 부성 콤플렉스에서 아직도 벗어나있지 못하다. 늙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이 소설 이후에‘사람의 아들’은 암울했던 1970년대 상황에 대하여 종교를 통하여 문제를 제기의 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천당과 영원을 약속하는 기성종교가 비현실적이며 사람의 아들들에게 더욱 절실한 삶의 복락과 현세적 의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교회에는 나가도 나이롱 예수쟁이에게 아주 그럴듯한 감성으로 어루만져 주는 내용이다. 이문열의 영악함은 이렇게 극단적인 두 집단을 함께 아우르는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신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종교적 진리의 실현보다는 사회적 정의의 실현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이 점은 구원보다는 정의를, 신의 논리보다는 인간의 논리를 계속 추구하는 주인공 민요섭의 지향이 결국 신의 은총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에 놓여있다고 결론을 짓는다.

 

이문열이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이 살아있다면 이렇게 따지고 싶다.

“어떻게 설교를 했기에 이 아이가 이렇게 됐습니까?”

이 세상은 악의 무리가 판을 치는 해적선이라서 하나님을 모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선함과 정의는 그저 같은 해적끼리 주고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면 최소한 이따위 논리는 펴지 않았을 것이다.‘정의’는 인간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이 저지른 악행은 신을 팔아 정의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이 시대의 적자(赤子) 이문열

어린시절 부모의 죽은 큰 상실감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뿐이다. 살아가면 아무런 이유 없이 죽는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사람의 죽음은 이유가 없다 필연이다.

하지만 이혼은 다르다.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인생 내내 배신감으로 몸을 떨게 된다. 만일 이혼이 흔해빠져서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이 온다면 인간세상은 말세에 도달했다는 확증이다.


죽음도 이혼도 아니면서 이데올로기를 따라서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에 대한 이문열의 생각을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이글을 쓰면서 가장 고민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 부분이다.

죽었거나, 갈라서거나, 버려진 상황에서 남아있는 부모의 영향은 지대하다.

왜곡도, 폄하도, 승화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문열의 어머니에 관한 정보라고는 이문열이 난감 할 정도의 상당한 음치 였다는 사실과 황소라는 소설 속에서 나오는 위대한 어머니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한 혈족 안에서 일어나는 글에서 잠시 엿 볼 수 있을 뿐이다.


본인이 성장하여 역사를 알고, 시대를 읽어 낼 줄 알아도 이는 이성적인 판단이지, 어릴 적 충격적인 감성에서 벗어나거나 바꾸기나 어렵다. 이를 잘 나타내는 이문열의 글이 있다.



<고향>

 

아아, 아버지, 아버지.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조차


본 적이 없는 그 막연한 추상, 그러나 집안 구석구석


살아서 떠돌며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의 먹구름을 몰고


오던 두렵고 음산한 망령, 내 삶의 부하(負荷)였으며



알 수 없는 원죄(原罪)를 내 파리한 영혼에 덮씌우던


악몽, 깊은 밤 선잠에서 깨어나 듣던 어머님의 애절한


흐느낌과 몽롱한 내 유년 곳곳에서


한과도 같은 그리움을 자아내던 이였으되 또한 듣기만


해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소스라쳤던 이름의 주인…….



어쩌면 이문열에게 아버지는 예수 같은 존재이다. 그의 삐뚤어진 기독교관은 예수를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투영하고 일체화 시키고 있다는데 있다.


실체가 없이 자신에게 원죄를 덮어씌웠다고 하소연하나 그러하기에 자신에게 보통사람을 뛰어 넘는 상상력이라는 기름을 부어준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다 못해 팔아먹고 있다.


그의 소설은 ‘군사독재시절에는 자신을 허무주의로 위장하고, 80년대 정치참여를 거부하거나 회피한 청년층과 중산층을 주 대상으로 얄팍한 교양을 고취시키는 한편 종교를 폄하해가며 공략한 소설’이다.

 

이문열의 소설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주 멀쩡한 집단 같지만 이 시대에 심각한 정신병적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이는 자신의 가정을 돌아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이문열의 소설이 좋지 못한 이유는 시대의 아픈 상처를 안고 사는 현대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림과 동시에 강력한 진통제를 놔준다는 사실이다.

 

음식점의 음식이 맛있는 이유는 소금 한 큰술과 백설탕 한 큰술을 넣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다. 그의 소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