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취미

프로이드의 ‘햄릿 정신분석’

두 아들 아빠 2007. 4. 12. 09:47
(소설 ‘살인의 해석’의 530여 페이지 중 9번에 걸쳐서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 관한 분석을 정리)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은 달리 말할 필요가 없는 대작이다. 공연으로도 햄릿만큼 많이 무대에 올려진 희곡도 없으며 성경 다음으로 문학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주석서와 분석의 글이 씌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극의 핵심 중에는 기묘한 공백이 있으며 이 점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흡입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햄릿의 모든 행동은 주인공이 행동 할 수 없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희곡은 우울증에 빠진 햄릿이 아버지의 살인자- 덴마크의 왕자이자 어머니와 결혼한 삼촌 클로디어스-에 대한 복수를 미루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올린 핑계와 변명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핑계와 변명은 고난에 찬 독백으로 강조 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사느냐(to be)로 시작하는 바로 그 말이었다.


햄릿은 복수를 미루고 잘못된 절차를 밟은 탓에 몰락이 다가오고 나서야, 즉 오필리어가 자살하고 어머니는 클로드어스가 햄릿을 죽이려고 준비한 독주를 잘못 마신 탓에 죽고, 또 햄릿자신은 레이티즈의 독검에 치명상을 입은 직후에야 마침내, 희곡의 마지막 장면에서 삼중으로 박탈된 삼촌의 삶을 처단 할 수 있게 된다.


햄릿은 복수의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불구하고 망설이고 외면하여 나약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였을까? 이 때문에 3세기 동안 수많은 관객을 끌어 모이지는 않았을까 한다. 이에 관하여 ‘괴테’와 ‘쿨리지’도 규명을 하려 했으나 실패를 했으며 그보다 못한 수백 명의 문학가들은 맨땅에 머리를 박아 깨지기도 했다.


프로이드는 서구 문학의 가장 유명한 수수께끼에 대한 답변으로 꿈 해석에 대한 책에 200단어 분량으로 가볍게 풀이를 해 놓았는데 당시로써는 아주 새로운 차원이었다.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말이다.


햄릿은 정작 자신이 목표했던(어쩌면 독자나 관객이 원했던) 클로드어스를 죽이기 이전에 많은 결정적인 행위를 반복했다.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크로드어스가 자기 죄를 드러내도록 극을 계획하고 실행도 했다. 그리고 로젠쿠라츠와 길든스턴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가진 악인을 죽이지 못하고 계속 망설인 것이다. 이를 프로이드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햄릿은 삼촌 클로드어스의 행동에서 자신의 비밀스러운 오이디푸스의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클로드어스는 햄릿 자신이 소원하던 일을 한 샘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복수로 이끌었던 혐오는 양심의 가책과 자기혐오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사느냐 살지 않을 것이다.’를 독백하고 자기 같은 아들을 낳지 않기 위해서 ‘죄 많은 인간을 낳으려하는가?’ 라고 하며 오필리아에게 반복해서 수도원으로 가라고 명령한다.


클로드어스를 죽이는 것은 자신이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재현하려는 행위인 동시에 일종의 자기 학살이었다. 이로 인하여 햄릿은 비이성적으로 과도하게 자신을 나무라는데 바로 ‘사느냐 죽느냐’ 라고 하며 자살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사느냐 죽느냐’의 해석


하지만 ‘사느냐 죽느냐’ 에 꼭 프로이드식 의미만 있지 않을 수 있다. ‘사느냐 죽느냐’는 원문의 ‘있느냐 있지 않느냐’(to be or not to be)를 의역 한 것이다.


햄릿은 행동하면 죽을 것 같다고 느꼈다. 햄릿에게 있느냐(to be)는 행동하지 않음(not to action) 을 뜻한다. 행동에 나서면 죽는다. 즉 ‘있지 않다’고(not to be)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는 해답이 아니다.

 

‘있은 것’과 ‘행동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삶과 행동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다.


(있느냐) 있지 않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과 일격에 따른 고통을

참는 것이 숭고한가,)


재앙의 파도를 두 팔로 막아

물리침이 더 숭고한가, 죽는 것은......


따라서 셰익스피어는 있음(to be)을 행동하지 않음(not to action) 으로 썼으며

죽음의 두려움으로 끝을 맺지 못했다.


햄릿은 클로드어스의 행동을 연극화해서 그의 죄를 드러내려고 했다. 행동은 했으나 맨 처음은 연극으로 가장하여 다가간 것이다. 그러나 행동은 시작한 일이다.


이는 ‘그대로 있을 것이냐’(seeming) 와 ‘그렇게 보이게 할 것이냐’(to seem)의 갈등구조로 보아야 한다. 그는 행동하기 위해서 실재보다 가장을 선택해야만 했다.


마지막엔 햄릿은 숙부에 대항해 행동하고 결국 죽게 된다. 아마도 햄릿은 이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운명론으로 넘어 감은 잘못된 해석이다.


‘있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다.

햄릿이 마비된 까닭은 어찌된 일인지 행동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등식, 가짜 등식은 한 번도 완전히 이해된 적이 없었다.


또 다른 해석


위 유명한 대사는 햄릿 자신의 가치 기준을 동일하게 ‘숭고함’이라고 했다. 도대체 뭘 숭고하다는 것일까? 가 문제다. 신앙, 명예, 가문... 이 모두를 합친 것일까?


그 숭고함을 누구에게 인정받겠다는 말인가? 국민들, 어머니, 오필리아...

명확하지 않은 이런 갈등도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자살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좌절감에서 마지막 남은 선택을 한 것이다.

햄릿은 자살의 고민도 했다.


프로이드와 다른 오이디푸스 해석


프로이드의 영향으로 나온 오이디푸스식 해석을 통하지 않고는 햄릿의 분석에 접근 할 수 없다. 하지만 프로이드는 큰 오류가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서술부의 주어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다. 따라서 아이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부모의 콤플렉스는 더 심해진다. 딸은 곧 어머니가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젊음과 미모를 갖추고 대적하데 된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따라잡게 되고, 아버지는 자신을 밟고 지나가는 세대교체의 거센 물결을 실감하게 된다.


오이디푸스가 어머니를 갈망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꾀한다고 속삭인다. 이 질투가 더 강열해 질수록 부모는 아이에게 대항해 더 파괴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결국 아이들은 자신들을 적으로 보고 달려들게끔 만든다. 그들이 두려워하던 상황을 이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욕망은 아이의 마음속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