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취미

어제 초대 받은 오케스트라 연주회

두 아들 아빠 2007. 4. 6. 23:42
어제 저녁에 우리 가족 모두는 이웃의 초청으로 연주회를 갔다. 이웃의 자녀가 고양시에 있는 일산유스챔버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있는데 40여명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다.


모차르트 곡 두 곡을 필두로 마지막에 브라암스의 헝거리안 무곡을 연주 했다. 단원의 대다수가 전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감안 한다고 해도 어린 학생들치고는 훌륭한 연주 실력을 보여주었다.


지휘자도 말했지만 성인의 기교에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연주회 준비를 하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 감동은 ‘비장함이 없는 자기표현과 그들만의 조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무슨 일을 할 때 ‘죽기 살기’로 한다고 한다. 여기에는 비장함이 가득하다. 물론 단기적인 성과를 올리기에는 효과적일 수는 있으나 인생의 전반을 살아가는 데는 비장함으로는 살수 없다. 비장함은 부자연스러움이고 깨지기 쉬워서 일찍 포기를 부를 수 있다.


바이올린을 연주한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인 이웃의 자녀는 우리 큰아이와는 한 반인데 어제 무대위에 있던 모습은 길에서 만난 사춘기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이렇게 무대와 그 아래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는 물론 자신들도 그동안 악기를 배우면서 느꼈던 모든 고통이 관중의 열광으로 충분히 보상 받았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나라 예술계는 아카데미인 대학을 정점으로 뿌리 깊은 서열화가 존재한다. 누구에게 사사 받았고 어떤 대학을 나왔으며 유학은 어디로 갔다 왔는지가 실력보다 더 중요하게 친다. 사실 실력 차이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대학 교수가 동네에서 아이들을 모아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연습을 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음악을 하는 아이들이 많이 늘었다는 뜻이다. 연주회는 철저히 관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어제 연주회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첫 시도 일 수 있다.


문제는 연주회가 끝나고 있었다. 우리가족 말고도 서너 가족이 초대를 받았는데 초대한 사람이 연주회가 끝나고 동네에서 뒤풀이를 하자고 제안을 해서 갔는데 다른 가족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연주회가 끝나고 로비에서 만난 다른 이웃 아내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부러움이 자책으로까지 이어진 것 같았다. 혼란한 정신 때문에 뒤풀이에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다.


초대 받은 이웃들은 그 집 딸아이와 같은 학년의 학생 부모들인데 자신들의 자녀는 학원에 가느라 단 한명도 오지 않았다. 참 욕심이 많은 부모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