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대한민국 국문학도에게! 우리의 문학은 이래서 죽었다.

두 아들 아빠 2007. 2. 13. 10:42

이상한 국문학과 

제목이 왜 국문학도인가? 기성 작가, 선생, 교수에게 기대를 걸 수 없다. 이미 잘 못 된 기득권 안에 깊숙이 있는 자들이 자기 부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문학과에는 다른 과와 달리 성격이나 언행이 아주 독특한 학생들이 꽤 있었다. 이들은 학년이 올라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이를 문학하는 사람들의 기인 같은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문학은 인간의 고도한 이성적인 창조 행위지, 개똥철학자 같이 기인 같은 언행을 하면 안 된다. 그들이 그런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30~40년대의 사상을 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작년 9월에 전국 80여개 인문대학장들이 모여서 인문학위기를 토로하고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 했다. 십년 전부터 타령만 해오던 인문학의 위기는 국문학에서 나왔다. 대학에서 국문학과만큼 생산성이 떨어진 예는 없다. 가히 무위도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서울의 한 종합대학교가 국문학과를 패지 했겠는가?


  한문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냐는 쓸데없는 논쟁을 오래 했지만 아직도 정리되지 못했다. 천년이 훨씬 넘게 배우고, 써왔던 문자를 없애야 한다는 사람의 무식함을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의 사상 전부를 지우자는 것과 같다. 이는 세종 대왕이 한글을 만드신 뜻과도 위배 된다. 한문이 사대주의라고는 하는 사람은 자신의 조상 중에 친일을 하지 않았나 하는 것부터 먼저 알아봐야 한다. 오늘날 과거처럼 한문 숭상주의자는 많지 않다. 이를 영어가 대신하고 있다. 문자는 사상의 초석이다. 문자 자체에 사상과 철학을 담은 것은 지구상에 한문밖에 없다.


국문학의 허접함

  우리가 그동안 근대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 받았던 시인, 소설가 등 문학 작가들 가운데 많은 수가 친일이나, 군사독재자들의 입맛에 맞는 영웅주의 우파 작가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시 사회의 주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서 매년 작가의 기일을 기리며 문학당과 생가에서 굿판을 벌인다. 여기에 초청되는 대학교수는 가문의 영광으로 안다.


  대표적인 것이 매년 가을에 중앙일보가 주체하는 미당 서정주의 문학관에서 벌어지는 ‘미당제’ 다. 친일파의 과거의 작품이 뛰어 남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이 과연 문학적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들의 작품은 문학적으로 또는 서정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한국인의 정서를 잘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교과서뿐 아니라 모든 문학계와 대학에서 떠들어 댔다.

그런 자들 밑에서 배우고 자란 사람 역시 그 모델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문학의 가치 평가는 우리만이 할일이 아니다. 남이 평가하고, 알아주어야 한다.

문화란 보편타당성과 쏠림현상이 있어야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우상 같이 받들고 있는 친일파의 작품을 세계에서 알아 주냐는 것이다.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것을 자기들만이 추켜세우고, 매일 밤 즐기던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춤이다. 이도 이제는 원시의 원형이 보인다며 세계가 알아준다. 그러나 우리가 반세기 동안 우상숭배 했던 친일파의 문학 작품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 작품을 모델 삼아서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써 대는 작품을 현제까지 이 세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노벨문학상은 후보에도 못 오르고, 세계적인 문학상 수상도 요원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문학도들은 친일 근대문학과 이를 추종하는 문학의 대한 대대적인 해체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문학은 단 한 걸음도 나 갈 수 없다.


 

허무주의 패배주의가 판을 치는 문학

  박정희 철권통치가 호령하던 시절에 젊은이들은 히피족을 지향했다. 곧 이어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70~80대 포크가요의 가사는 거의가 친일의 시 나, 이와 유사한 것을 이용했다. 송창식, 해바라기 등등 이다. 당시의 젊은이들의 심성을 이성이 아닌 감정만을 증폭시켰다. 이들의 힘없는 노래는 장군 출신의 독재자들에게도 마음에 들지 못했다.

“젊은 것들이 패배주의자나 부르는 노래나 불러!” 이들이 나오는 텔레비전 연예프로를 대폭 삭감시켰다. 대신에 이들보다는 활기 찬 신세대 가수들이 등장 했다.


  친일에 뿌리를 둔 세력과 군부독재 권력자의 비호 아래 이들과 뿌리가 같은 학자와 대학교수, 언론들이 이를 떠받들었다. 그래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근대문학을 나름대로 나누기는 했지만 친일사관에서 바라본 게 전부이다. 우리의 근대문학은 인간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주의’가 판을 친다. 서정주는 그 이름으로 한몫 본 것이다. 다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목가적 문학이다. 이를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런데 이를 누가 알아주었는가?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기반을 둔 서양 문학은 우리의 근대문학을 도무지 이해 할 수없었다. 철학도, 사상도 담아 있지 않은 감성만 판치는 시나 소설을 제아무리 영문 번역을 잘해도 그들에게 절대로 다가 올 수 없는 문학이다. ‘이게 뭐야’ 쓰레기 취급이나 받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이런 허접한 것들을 자신들의 친일을 호도하는 방편으로 여지 것 부여잡고 있다. 그들의 희고 가증스러운 손등을 인두로 지저서 내려놓게 해야 한다.


  국문학사의 연구 차원에서는 친일의 문학은 마구잡이로 칭송을 하지 않을 정도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 가고 있다. 하지만 기성작가로서 신인등단의 길은 아직도 친일 사관이 꽉 들어 찬 언론 매체가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 그들의 입맛에 들어서 통과의례를 치루지 못하면 기성작가로 활동 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현실이다.


  대학교수라는 자들도 친일사관의 교수 밑에서 학위를 받고, 언론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하려고 안감 힘을 쓰고 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선출되면, 그들로서는 최대의 영광이다. 이들을 퇴출시키는 방법은 대대로 내려 온 친일 사관 문학계보와 그들 문학의 허접함과 패악함 만천하에 들어내야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과 사상이 진보된 이념을 만나면, 먼저 낡은 사조는 새로운 세력으로부터 철저히 해부를 당하고 혹독한 비판을 거쳐서 우뚝 서기 마련이다.

우리의 문학사는 이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비판 자체가 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매도되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이제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는데 무슨 말을 하냐고 할 것이다.

올바른 표현은 기득권이 인정하지 않아서 널리 알려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들 한쪽 뇌가 녹아 내렸다. 그래서 올바른 눈도, 감각도 없어졌다.


  일부는 생존을 위해서 친일의 사조를 따랐다. 이는 문학가로서 여성이 성을 먹고사는 방편으로 삼는 것과 같은 치욕이다. 그런 치욕 속에서 온전한 문학이 나올 리 없었다.

그래도 이들에게 많은 대중은 열광했다. 강력한 마약대신 향기 좋은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과 같다.


 

문학에서의 색깔론

  마르크스 사상을 추종하는 문학가는 예전엔 죄다 ‘빨갱이작가’라고 하다가, 이제는 국적도 없는 애매한 표현으로 ‘프로문학’과 ‘카프문학’이라고 분류한다. 친일작가가 우상처럼 떠받을 만큼 환대를 받았다면, 이들 좌파 문학가들은 빨갱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철저히 외면당했다.

 

바탕이 부족한 종합예술

  문학이 계속 암흑의 시대를 보내면서 영화는 의식 있는 젊은 감독을 중심으로 장족의 발전을 했다. 그러나 영화는 연출과 제작자의 한계가 있다. 스토리가 받쳐주어야 한다.

좋은 드라마나 영화는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는데, 문학이 허접한 상태에서는 시나리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드라마와 영화는 시나리오의 허접함을 영상과 연출 기법으로 때우고 있다. 이게 오늘날 우리 영화의 한계다.


사상의 바탕은 민초

  그 시대는 극단적인 세 부류의 인간군상이 존재했다. 마초와 패배주의자, 이도저도 아닌 중간군상이다. 근육의 힘만 부리는 자가 마초가 아니다. 얄팍한 지식을 무기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힘도 무기도 없는 자들은 패배와 허무에 젖어 들었다.

이들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자폭을 하거나, 폭발했을 것이나, 생존을 위해서 묵묵히 살아온 무지렁이 같은 민초가 폭압적인 마초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어서 더 큰 폭압을 피하고, 한편으론 무기력한 패배주의자를 쓰다듬고, 보듬어 안고 왔다. 역사는 패자와 승자 사이에서 승자의 쾌감도, 패자의 쓰라림을 다 받아가며 이리저리 짓눌린 민초가 감내했다.



우리의 현실

  대한민국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과학적이며 독자적인 한글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인류 문명의 삼대 본산인 중국문자를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 동안 써왔다.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중국보다도 더 한문의 원형을 구사한다. 여기에 국민의 1/4 이 기독교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는 근대이념의 양대 산맥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이념뿐 아니라 그 상처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컴퓨터 자판 시대에 가장 걸 맞는 한글과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는 한문을 그동안 갈고 닦았던 영어를 기반으로 기독교 사상까지 담아내면 대한민국은 세계의 문학과 문명을 주도 할 수 있다.

일본이 사상과 종교는 받아들이지 않고 서양의 조총 하나를 받아 들여서 한반도를 유린했고, 세계대전까지 일으켰다. 결국 처절하게 패배했지만, 아직도 힘을 쓰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현재 대한민국은 훨씬 더 훌륭하고 많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핸디캡도 있다. 온갖 잡탕문화가 뒤섞여 있는 ‘무질서’라는 염려다.

그릇은 용량이 넘치면 주변을 적신다. 그런데 넘침이 없다. 우리의 문화 포용력의 크기를 칭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릇에 물을 붓는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라는 것이다.


문화는 부피가 있는 물질이 아니라 녹아드는 용매라고 할 수 있다. 설탕을 넣으면서 물을 가열하며, 계속 저어주면 과포화상태가 된다. 젓기를 중지하거나 열이 식으면 설탕 덩어리가 응결된다.


우리의 과거 50년간 문화와 사상이 물밀 듯이 들어왔지만 열을 가열하고, 계속 저어주는 상황에서 수용을 한 일이다. 이제는 열(경제 부흥)도 식고, 저어주는(인구 증가 및 사회 활력) 것도 멈추면 각 문화의 응결과정에서 크고 작은 소란이 일어 날 일이다.

 

'논술고사'는 인문학의 위기를 고등학생에게 떠넘기는 짓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대학입시에 논술을 치루는 것으로 활성화 하려는 아주 저급한 시도를 하고 있다. 논술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와 사회적 여건이 받쳐주지 않은 데서 밀어붙이기식으로 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논술의 주제는 접근론과 방법론을 거쳐서 참과 거짓의 진실 게임으로 갈 것이다. 논술을 주장한 사람들이 과연 이를 다 받아 낼만한 정당성과 의식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기들 밥벌이를 위한 제시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서 되돌아 올 것이다.

 

미래지향

  친일과 군사 독재는 그 자체의 패악함도 있지만, 이를 변명하고 지지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왜곡을 불러 온 것이 더 큰 문제다.

인문학의 위기는 경제성만이 문제가 아니다. 낡은 사상과 정의롭지 못한 바탕을 두고는 새로움과 의식의 발전은 기대 할 수 없다.

구체적인 해결은 남북 분단 문제와 친일사관의 척결, 왜곡된 유교와 기독교사상의 바로 잡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