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태생의 억울함

두 아들 아빠 2007. 2. 28. 11:02
흔히 태생에 관하여 먼저 생년을 묻고, 고향과 양친 부모를 말하게 되는데, 정신과에서는 축복(환영)받은 태생이냐, 그렇지 못하냐를 제일 처음 묻는다. 이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여러 형제들 중에서 가정에서 위치가 아들과 딸의 구분과 몇 번째였는가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때로는 정말 무식하게도 자녀의 태생 때 아버지의 사업 흥망과 집안의 우환 여부에 따라서 복덩이니, 아니니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세계의 어느 샤머니즘에도 없는 웃기는 일이다.


이런 부모들의 무식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녀가 커서도 이를 말하게 되는데, 이를 들은 자녀들은 엉뚱한 문제에 봉착한다.

복덩이 경우는 마치 자신의 태생이 집안에 무슨 큰 영향이나 끼친 것 같은 자만심이 들고, 다른 형제의 시기심을 불러온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가뜩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 온 것도 억울한데, 자신에게 이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는 일에 분노마저 든다.


‘이들은 살아가는 내내 부모의 뒤틀린 감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미움을 받을 만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삼가는 노력으로 미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모에게 불쾌감을 일으킨다면 자기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는 난감하다.’


이런 경우 부모로부터 방관과 박해로 성장 후에 결핍과 피해의식증상 등이 나타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이 되어도 뒤틀린 심성이 고착화 된다.


이로 인한 가벼운 증상으로는 지나치게 유행을 따르거나, 분수에 넘치게 명품에 집착한다. 이런 증상이 여성에게 많은 것은 결코 성(性)만의 특성은 아니다.


 안타까운 일은 유행을 따르고, 명품을 걸치고 다닌다고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퍼마시는 것과 같다. 일시적인 충족감뿐이다.


그 바닷물의 맛도 못 본 여인들은 사랑의 증거가 없다고 투덜댄다.

이를 지지해 주지 못하는 남편을 원망하는 것이다. 이는 남편 자체가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사랑해서 이것들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혼인을 한 일이다.


명품에 대한 충족감과 갈구는 타인의 부러운 시선이 결코 일시적이 아니라서 열광한다.


심각한 경우는 자기 만족감을 채우기 전에는 도무지 남에게 양보나 배려는 없다. 그 만족의 갈급은 일상에서 늘 있기에 결코 만족된 삶을 살기 어렵다. 평상시에 별다른 이유 없이 얼굴이 화난 표정이나, 굳어있다면 그런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다.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태생의 불공평부터다. 하지만 이를 균형 잡는 것이 분명 있다. 


태생의 억울함은 의식의 발상을 조금만 바꾸어 보면 그리 억울할 일이 아닌데도, 아주 오래도록 남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선택이 아니고, 노력 여부에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의 탁월한 선택도 아니고, 노력도 전혀 없었으면서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삶을 누리는 사람 중에서 이를 늘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따지기 이전에 각자의 태생부터 구조적인 모순 덩어리다.


인간은 권력의 의지를 타고 났다. 혼인 전이 사회적인 관계는 그런대로 원만해도 가정을 이루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여실히 들어 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가족의 절대 권력자며, 여자는 그 차 상위자이기 때문이다.


태생의 억울함을 지니고 살아 왔지만 혼인을 하여 자녀를 갖는다는 일은 크나큰 은혜이며,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의 기회다. 오늘날 이혼이 많아진 측면은 자녀의 탄생에서 별 의미를 찾지 못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자녀 때문에 더 큰 분란의 씨앗이 되어서다.


이들은 또 다시 태생의 억울함을 다음세대에 대물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