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
자살의 메커니즘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좌절감에서 마지막 남은, 딴에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살자는 뜻밖에도 자살 직전에 여지 것 느껴보지 못한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이로 인한 희열을 맛본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살자은 ‘강력한 삶의 애착심’을 놓고 싶지 않아서 자살을 감행한다.
희망이 없어서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한다는 사람은 자살을 진정으로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만큼, 인간이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일 때는 없다.
문제는 애착의 정도가 광적이라는 것이다. 미쳤다는 뜻이다.
‘자살자는 살아남아 있는 사람의 동정심도 염두에 두고 있다.’ 과연 그럴까?
자살자는 살아남은 자의 동정심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고, 속으로 깊은 저주를 하고 간다.
미안하다, 죄송하다고... 그럴듯한 유서내용이야 말로 살아남은 자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하려는 더 깊은 저주가 담겨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 죽은 자의 저주가 두렵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사이비를 제외하고는 자살을 큰 죄악시 한다. 그런데도 자살자에게 대하여 동정심만 보이지 자신들이 믿는 율법이 정한대로 죄악시 하지 않는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주변과 사회가 몰고 간 것이다. 자살을 죄악시하지 않는 이유는 이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 때문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혼자 죽어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자신과 영원한 단절이라는 징벌로 하지만 이젠 억울함이 커서 그런지 혼자 죽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수의 타인의 죽음과 같이 가려는 이유는 자살 안에 복수의 메커니즘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목숨을 빼앗고 자신도 자살로 끝을 내는 사람은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는, 병적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공평함과 정당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살인 하지 말라’는 말은 ‘하라’는 좀 약한 사명과 ‘말라’는 아주 강력한 권고가 아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인을 한다.’는 비중과 뜻이 일맥상통한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늘 ‘하라’와 ‘말라’는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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