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감독은 참여정부 초기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쾌거를 얻은 것이다. 이런 사람을 장관으로 임용하는 나라는 진정으로 예술을 이해한다는 호평을 세계적으로 받아야 한다.(아님 말고~)
진정한 용서는 과연 인간의 영역인가?
정작 용서 할 자를 앞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며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살인마의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 하는데, 자식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간 여인의 속마음은 어떤 것 이었을까?
아마도 용서를 함으로써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의 짐을 덜어 보려는 처절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범인을 찾아 갔는데 상대가 ‘나는 용서를 받았노라’ 하니 황당한 것이다.
이는 서로 용서와 구원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하자면 용서는 죽은 아들이 해야 한다.
죽은 자가 무슨 용서를 하냐고? 그럼 남을 대신에서 하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인가!
살인자를 용서 할 만큼 신앙심이 생긴 사람이, 용서 받을 사람의 뻔뻔한 태도에 무너졌다는 것은, 분명 용서라는 행위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것이다. 용서를 상급을 바라고 하면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자기위안’이다.
자기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기 소유물이라는 관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함이다. 이는 신앙의 균형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인 행위에 대하여 용서하신다고 한 적이 없다. 살인마가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는 것도 개가, 소가 웃고, 하늘이 노여워 할 일이다. 견디기 어려운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끝에 성공한 일종의 ‘자기최면’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기최면’을 믿음 얻기와 치유에 가장 잘 써먹는다. 기독교는 최면술이 아니다. 진리다.
살인귀는 스스로 용서도, 구원도 준 것이다. 이놈은 철저히 자기 주체적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설정하고, 규정짓는 능력이 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죄란 일반 외상 같이 치유는 됐지만 자국은 남아 있는 것처럼,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고, 죄의 흔적과 그 상처까지 말끔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뻔뻔한 인간들은 죄의 자국도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죄책’ 즉 죄에 대한 책임은 끝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죄의 흔적이 씻겨 지고, 상처도 잘 아물었는데도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아파하는 심성이 연약한 사람도 있다.
‘진정한 용서’란 인간끼리 주고받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일 살인마가 구원 운운하지 않고 용서를 하러 온 엄마에게 감음하여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했다면 마음의 짐을 덜고 홀가분해졌을까?
기독교의 구원론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죄에 대한 인식부터 세상과 다르고 용서의 조건인 회개 또한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구원은 내 쪽의 열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장로교은 ‘무조건 선택’을 교리로 삼는다. 그런데도 한국 장로교회는 구원을 각자의 의지에 의해서 받는다고 가르치거나, 고작해야 신인(神人)협동 설을 말한다.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들이 오해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으며 그 이유는
첫째- 성도들을 우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순간의 최면도 이용하고, 지쳐서 나가 떨어 질 때까지 우려 먹는다.
둘째- 자력구원으로 유도하여 교회가 성도에게 힘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
셋째-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 책임을 각자에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에서 기도를 기계적으로 하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이른바 ‘간증’이라는 것을 한다. 어린자식이 죽으면 슬퍼야지 웃음이 나오면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기쁘다고 웃고 있다. 이는 명백히 살인자가 성공한 ‘자기최면’과 동일하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
맞는 말이나 다 맞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인 중에서 믿음의 기간이 좀 되기 시작하면 자기 주변에 일어난 일을 멋대로 끼워 맞춰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신앙적으로 느는 실력은 이런 것뿐이다.
하나님은 아주 큰 틀과 섬세한 부분까지 라도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심은 맞다.
그러나 벗어 날 수 없는 틀 안의 작은 것은 상관하시지 않는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는 공의롭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기에 벗어나면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없다 하고 원망하다.
아이 엄마는 죄 없는 어린 자식이 왜 죽어야 하냐고 하늘에다 대고 울부짖는다.
결국 가짜 치유는 걷어치우고 인간의 자유 의지 대로 세상에 복수를 하기 시작한다.
자기 마음대로 하지만 결코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는 구도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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