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부터 좀 그렇다. 십자가와 칼은 아무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억지로 연관을 시키자면 십자가는 용서, 칼은 폭력으로 대비 될 수 있는데, 십자가를 용서에 직접 연관 시키면 안 된다. 원래는 십자가 모양이 아니라 T 자 였다는 설이 있다.
먼저 십자가의 물리적인 의미는 그저 2000년 전 로마시대에 잔혹한 ‘처형의 틀’일뿐이다.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도 십자가 자체에 거룩함이란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다른 처형도구에 돌아가셨다면 그 형상을 목에 매달고 다닐 것인가?
십자가에 올바른 의미를 부여 한다면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대신 처형을 당하신, 당시에 최고로 고약한 형벌기구였을 뿐이다.
한손에 칼, 한손에는 십자가라든지, 십자가를 거꾸로 쥐면 칼이라 하는 엉터리 같은 말도 지어 내게 되었다. 어찌 되었건 십자가 자체에 어떤 의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선전하면서 화두로 던진 것을 나름대로 답을 해본다.
- 예수님은 살상을 금하셨는데 군에 입대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전쟁은 집단적인 히스테리 현상이며 남자들은 여자를 억압하고 남은 힘으로 전쟁을 한다고 한다. 스스로 피를 흘려서 죄 값을 받는 행위다.
자기는 신앙을 지킨다며 군 징집을 회피하면 다른 사람의 신앙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기주의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신앙만 고집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는 ‘양심적 병역 기피자’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군에 입대하면 안 된다. 대체 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택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군대에 가야 할 정황이라면 가야 한다. 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의 오염됨으로 인하여 감당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도 예외 없이 감내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며 빠져 나가거나, 자기 학대를 하거니 금욕주의적으로 빠지면서 견디려는 짓은 자기 안에 또 다른 신앙심을 만드는 행위다.
- 정의로운 일을 위해서라면 폭력을 사용해도 될까?
‘정의’와 ‘폭력’은 공존할 수 없는 말이다. 인간이 정의라고 하는 것은 실은 자기 기준의 판단 일수가 많다. 악인은 스스로의 꾀에 실족한다고 하시며, 악을 징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정의를 팔아 폭력을 휘둘러 약탈까지 한 대표적인 사건이 십자군 전쟁이다. 그 이후로도 이런 명목으로 치룬 전쟁이 무수히 많았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짓이 정의로운 일을 위해서 하는 폭력이라고 하는데, 그 결과가 어떠한가? 그저 서로가 참담함뿐이다. 부시가 애초에 전쟁을 수행할 돈으로 중동의 빈민을 구제 했다면 테러가 일어났을 것인가?
마치 주유소를 털듯이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과 이스라엘의 안위를 위해서 왕권 국가가 아닌 중동을 억압하니까, 911사태가 난 것이다. 이를 자신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정의니, 신앙이니, 라고 말 할 수 없는, 그저 잔혹한 복수극 일 뿐이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자국에서 전쟁이 벌어져 본적이 없어서 전쟁에 관하여 전체적으로 낭만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인에게 폭력은 어떠한 경우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상대의 폭력에 폭력으로 항거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왼뺨을 대라고 하셨다. 돌려 대지는 못 할망정 폭력으로 보복을 하면 안 된다.
- 예수님의 뜻대로 아래에서 섬기다가는 기독교인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아래에서’는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며, ‘섬긴다. 는 바꾸어 말하면 ‘사랑한다. 는 말이다. 즉 자기를 ‘낮추고 사랑하라’는 뜻도 된다.
인격자끼리의 말은 잘 해석해야 한다. ‘아래’라고 한다고 인간이 만든 사회적인 이래 신분 이 아니고, 섬기라는 것도 맹목적인 복종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권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받은 존재로서 성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길 소원하며 실력을 쌓아야 할 존재들이다. 그런 과정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은혜를 점차적으로 받게 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 복음을 전파 할 때 노예와 여인네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의 억울함을 단박에 풀어 주시 길 바랬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희 상전을 나 그리스도와 같이 받들라’
-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일부의 잘못을 전체인 냥 매도하지 말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어느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 집단이 주는 공, 과를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일부의 잘못이라도 전체가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그 집단에서 나오면 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난받을 것을 비난하면 달게 받아야 한다. 다만 비난의 근거와 사실여부는 규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정황에서 비난을 한다면 안타깝게 생각해야 하며 할 수 있다면 적극 해명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의 잘못이 너무 많아서 욕을 달게 먹어야 할 경우가 훨씬 많다.
기독교인이라고 잘못되고 옳지 못한 교회와 기독교인을 옹호하고 두둔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듣고, 듣지 않고는 상대방이 결정 할 일이지만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말은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런 말을 했을 때 권면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들로부터 해악을 받을 정황이 분명하면 말 할 필요가 없다. 제자들에게 전도를 가기 전에 너희 말을 듣지 않는 마을에서는 나오라고 하셨다.
정죄는 하나님의 몫이라며 남을 비난하지 말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오용한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을 보고 나무라지 말라’는 말씀은 어느 특정 집단에 하신 말씀이었다.
이를 모든 인간관계에다 적용시켜서 마치 그리스도인은 남의 잘못을 전혀 말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오늘날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목회자들이 사람들의 정죄에서 비껴가기 위해서 엉터리로 지어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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