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가장의 권위

두 아들 아빠 2007. 8. 31. 12:52

  가정 안에서 가족들이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감은 권력자가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데 있다. 이에 가족구성원이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 이전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더 억울한 일이다.


  가장의 권위가 잘못 사용되는 이유는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세웠다고 하는데서 있다. 자신의 삶을 지지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아니 엄청난 살림살이를 지참하고 따라 나선 아내가 있었기에 비로소 왕의 자리에 앉은 일이다. 하지만 다스리고 보살필 백성이 없으면 왕이 아니다. 자녀가 있어야 백성이 있는 진정한 왕이다.


  권위는 '양날의 칼'이다. 그래서 함부로 휘두르면 칼이 튀어서 자신도 베일 수 있다. 감정대로 소리 지르고 난 후 마음속에 공허로움은 자해로 인한 상처의 아픔이다.

자녀의 진정한 독립을 가로 막는 부모도 있다. 대게가 경제력이 있는 부모들이 하는 짓인데 결국엔 그 짐을 끝까지 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버틴다.


  중년 이후의 가장이 심리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권위가 더 이상 먹히지 않음에 있다. 그래서 경제 활동에 더 몰두하거나 아애 외면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권위가 누군가로부터 한시적으로 이양받았다고 생각하면 상당한 마음의 안정을 가져 올 수 있다.


  자녀가 성인으로 성장 한 후 (겉모습만 성인인 경우가 허다함)에도 계속 주장하려는 것은 원천적으로는 권력의 의지 때문인데 어렸을 때 마땅히 돌봐야 할 시기를 다 놓치고 뒤 늦게 아비 노릇을 하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때는 지난 일이다. 더 이상한 어른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다 큰 자식을 놓아 주어야 한다.


  가장의 권위는 가족의 생활을 유지시켜주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에 왕관을 씌워주는 일이지 권위 자체가 아니다. 가장의 권위는 자녀를 교육 시키는 대서 나온다.


  농경시대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삶의 유지뿐 아니라 교육까지 모두 전담했다. 그래서 그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자식을 그저 일꾼 취급을 한 것이다. 착취의 대상이었다.

오래전 그림이나 사진에서 나온 아이들의 표정은 어두운 모습 일색이다. 모두지 활짝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예수께서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죽으라고 했을 까! 죽은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 주셨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당시 어른들과 부모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공부와 생활을 그럭저럭 잘 하던 아이가 사춘기 무렵인 중학교 2~3년 때 무너지는 경우를 주위에서 종종 본다. 대게가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 실패한 경우다.

오늘날은 자식교육을 국가가 세운 학교와 학원에 모두 맡겼다. 학교는 어쩔 수 없고 학원은 자신의 의지로 가르친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웃기는 짓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녀들을 얼마나 억압을 하고 있는가를 부모세대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세상이 먹고 살기 좋아졌다고 인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낮아짐을 볼 수 있다. 단군 이래 이렇게 잘 살아 본적인 없는데도 아직도 경제 살기를 왜치는 야권의 후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에게서 신화라고 불리 우는 성공담에 걸 맞는 인품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가장의 노릇 중에 경제활동으로 얻은 돈을 집안에 들이는 일은 아주 기본적이고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다라고 생각하면 결국엔 직무유기죄에 해당하는 외면을 혹독히 받아야 한다. 칼등의 칼날을 보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피에 쓰러져 간다.


  중년의 아버지가 외롭고 힘들다고?

되먹지 못한 권위를 먼저 내려놓아야 스스로 목에 맨 연자 맷돌에서 풀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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