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영혼의 치유는 내안에 억울함의 순화다.

두 아들 아빠 2007. 10. 3. 21:03
인간이 느끼는 어려움은 단연 ‘억울함’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억울함에 직면하는데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태생의 억울함’이다.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상관없기에 덜 억울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억울하다고 한다.


남들보다 못한 환경에서 태어난 억울함은 그리 크지 않다. 상실감과 배신감을 주는 억울함이 문제다. 부모가 일찍 죽어서 오는 상실감보다는 보모의 이혼 때문에 느끼는 배신감은 억울함을 넘어서 분노를 심어주어 미래를 망치기도 한다.


태생의 억울함은 성인이 되어 혼인 전까지 마감을 해야 하는데 늙어서까지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털어버리고 가야 하는데 부모가 뒤늦게 관심을 표명하며 달려들어서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태생의 억울함’ 다음으로 겪는 것은 ‘편애의 억울함’이다. 모두가 함께 겪는 억울함은 그저 힘들뿐이지 억울해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불평등은 억울함으로 작용한다.


‘편애의 억울함’을 다른 말로 하면 ‘인정받지 못함의 억울함’인데 가족과의 관계성까지 해치는 아주 좋지 못한 것이다. 가정에서 편애를 당한 사람이 사회에 나와서 이를 되 저지르는 수가 있다. 자신의 억울함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이다.


 ‘편애’ 다음의 억울함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함의 억울함’이다. 주로 자아가 인식되는 10살 이후로 나타나며 이를 죽을 때까지도 한다. 어렸을 적에 욕망이 심하게 억눌리면 무의식 속에 남아 성인이 되어 표출이 된다.


어렸을 적에 욕망자체가 완전히 거세된 불쌍한 영혼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분별하지 못하고, 어떤 목표를 세우고 맹목적으로 열심을 내어서 달려가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목표한 정상에 올라도 만족감을 갖지 못한다. 욕망이란 논리적인 설명을 듣고 스스로 거둘 줄도 알도, 때로는 고집을 피워서 관철시키기도 하는 연습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과정을 밟지 못하면 욕망의 분별력이 떨어져 자기만족의 정도를 가늠하지 못한다.


다음으로는 ‘노력의 대가가 만족하지 못함의 억울함’이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노력이 온전히 통하는 시기는 부모 밑에서 공부를 할 때다. 그런데 막상 그때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억울함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보살핌으로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면 개인의 노력보다는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린다. 그런 변화가 없는 곳이 이른바 ‘사’자 그룹과 철 밥통들이다. 그런데 삶의 안정은 먹고사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 남편 또는 자녀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의 억울함도 있다.


자기가 좋아서 한 혼인을 ‘속았다는 억울함’을 가진다. 옷 한 벌 사는데 엄청나게 비교 분석하고, 교양과목 선택에는 교수의 성향과 시험출제 경향까지 꼼꼼히 살피면서 반품도 재시험도 치룰 수 없는 정작 가장 중요한 인생의 반려자는 대충 눈 질끈 감고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은 자기 노력의 대가라고 어떻게 하던 끼워 맞추거나 쉽게 잊어버리고, 불행에 대하여는 남 탓을 하거나 ‘재수 없다는 억울함’을 아주 오래도록 갖는 기발한 이중성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람들은 위 억울함 들이 한대 뒤엉켜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렵다고들 하고 실제로 힘들게 살기도 한다. 억울함이 있는 사람은 남도 억울하게 한다. 일종에 복수 심리인데 문제는 억울함을 받은 대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에게 내지르기에 당하는 쪽에서는 황당할 뿐이다.


어려서 억울하게 살아 온 사람을, 그와 반대로 인정받고 잘 자라온 사람이 순화 시켜주어야 함에도 사회의 구성과 기능이 그렇게 함을 가로막고 있는 측면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잘못된 엘리트주의다. 겉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 안에는 귀족주의가 면면히 흐르는 인간들 때문에 우리사회가 나눔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누군가를 억울하게 해야 자신들의 가치가 오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인간이 억울함에 대해 속절없이 함몰되지 않는다. ‘승화’라는 작용으로 억울함이 더 나은 단계로 진보하기도 한다.

선한 일을 대가 없이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는 어려서 인정받고 억울함 없이 살아 온 사람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그들의 메커니즘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의 표출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선 한 일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려면 인정받고 잘 자라온 사람들이 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따로 인정받을 일이 없기에 남에게 도움을 주려하지 않는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좋은 모든 것들이 다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당연함 때문이다. 그게 되돌려 주어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진정으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개인의 억울함은 가정에서 시작되지만 그렇다고 가정과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 ‘사회정의’가 바로서야 된다. 사회에서 받은 억울함을 가정에서 풀거나 취미생활에 빠져 외면을 하는 가장들이 있는데 이에 대한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들은 안타깝게도 ‘사회정의’에 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저 이상하고 무뚝뚝한 남편을 원망 할 뿐이다. 남편 때문에 억울해하는 여성에게 ‘당신의 무관심이 대가를 치루고 있다.’라고 하면 뺨을 맞을 일이지만 사실이다.


이제 겨우 사회정의가 바로서고 있는 마당에 짝퉁이나 사이비들과 아애 뻔뻔함으로 무장한 인간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번 대선에는 국민의 반수인 여성들이 심판을 해서 우리의 다음 세대는 더 이상 사회적인 불의함에 억울함을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