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종교개혁기념일을 즈음해서

두 아들 아빠 2007. 10. 26. 20:27
 종교개혁 49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은 결의문에서

"한국교회는 아직도 신학적으로 진보와 보수, 정통과 이단으로 나뉘고 정치적으로 친미와 친북, 친정부와 반정부적 교회로 분열돼 있다"면서 "더구나 내면적으로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진 채 물량주의와 세속주의에 함몰되어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자성했다.


▲세속권력에 빠지지 않고 예언자적이고 영적인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고

▲수적 성장과 외형적 팽창 일변도의 선교와 전도 정책에서 탈피하며

▲물신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성경적 가치의 실현에 진력하며

▲약한 자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 섬김의 사명을 다할 것을 결의했다.


매년 이와 비슷한 성명서 내면서 하나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이상 방향으로 가고 있는 한국교회를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돌아오는 주일은 종교개혁기념일이다. 어찌된 일인지 한국교회는 이 날은 대충 넘어가고 내달 둘째주나 셋 째 주에 하는 추수감사절을 성대히 치른다. 지금이 일 년에 한 번씩 곡식을 추수하는 농경사회도 아니고 보너스는 12월에 나오는 월급쟁이들을 모아 놓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감사헌금이 최대의 관심사 일 것이다.


유교의 고도한 정신은 모두 사라지고 제사만 남은 현실과 같은데 이벤트라는 찌꺼기만 남기는 한국기독교도 마찬가지다.


16세기 이후 인류에게 가장 큰 사건은 단연 종교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역사를 왜 전 인류까지 확대시키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으나 종교개혁 뒤로 일어난 르네상스라고 불리 우는 개혁시대에 나온 문화와 경제, 정치, 철학이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그저 사막의 한 구석에서 양치기들이 믿던 종교로 안다면 우물 안 개구리 정도가 아니라 무지의 극치를 들어내는 짓이다. 기독교 사상은 서양을 400년간 지배했고 서양은 오늘날까지도 동양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권에 유학을 가는 사람 중에 특히 인문학을 배우려는 사람이 기독교를 모르고 간다면 눈을 감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 사상의 근간인 삼위일체 사상은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민주주의의 근간인 행정, 입법, 사법도 삼위일체사상이며, 재판의 삼심제도, 소설 삼총사, 육, 해, 공 등 서양에서 셋이라는 수자는 ‘완벽’을 상징한다.


1517년10월31일 루터의 95개 반박문이 걸리면서 서양은 종교의 암흑시대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인류 최대의 격변이 일어났다. 왕권이 무너지고 새 질서의 정치가 탄생하고 문학과, 철학이 쏟아져 나오다가 18세기 중엽에 산업혁명으로까지 이어져왔다.


서양의 미술, 음악 예술분야도 종교개혁 이후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음악의 경우 기독교사상의 약발이 떨어지고 변질되기 시작한 19세기에 멈추었다.


당시의 철학의 융성은 말 할 것도 없고, 오늘날 불후의 고전 음악가라고 불리 우는 비발디(1678~1741년)와 바하(1685~1750년)를 필두로 헨델(1685~1759년) 하이든(1732~1809년), 모차르트(1756~1791년), 베토벤(1772~1827년), 슈베르트(1797~1828년), 쇼팽(1810~1849년), 등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은 다 17~18세기 동안에 모두 나왔다.


서양은 20세기 이후 기독교가 점점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함에도 자신들의 세력을 아직도 굳거니 지키는 원동력은 그동안 사회 곳곳에 깊숙이 파고들어 정리된 기독교 사상이 사회저변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걸 우려먹고 있는 중인데 국물이 끝내주는 게 아니라 허연 멀 국이 되어가고 있다.


몰락의 확실한 증거가 나왔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고기를 갈아 사료로 먹여 광우병이라는 금세기에 끔찍한 병을 만든 일이다. 가장 과학적인 사고를 한다는 유럽과 미국에서 이따위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다는 것은 문명의 몰락을 입증하는 일이다.


루터 이후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존 칼빈’이다.

한국교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는 자신들의 신앙의 대 선배인 존 칼빈의 신앙방식을 따르기로 하는 교파다. 그런데 막상 존 칼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장로교인도 있다. 교회가 이를 가르치지 않고 숨긴다는 의혹도 있는데 자신들이 하는 신앙행위가 존 칼빈의 잣대를 들어대면 다 허접하고 이상한 짓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자생적 천주교는 200년이 넘었고 기독교는 100년이 넘었다. 한국 기독교는 60~80년 거치면서 산업의 발달과 함께 양적으로 엄청난 팽창을 가져 오다가 오늘날에는 정체기를 맞고 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16세기에 시작돼서 20세기까지 400년을 이어왔었는데 한국교회는 그 수명이 1/4밖에 되지 않는다.


수명이 짧은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를 들라고 하면 교회가 진정한 교회아를 길러 내지 못함에 있었다. 기독교학교라는 것들이 있지만 박정희 시대에 독재자가 던져주는 뼈다귀를 물면서 국가주의에 함몰되었다. 과거 더러운 독재자에 앞에 연속적으로 무릎을 꿇고는 용감하게도 가장 깨끗한 노무현대통령을 욕하며 공격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국가의 감시를 받아야 할 만큼 부패하게 되었는데 사학법 개정의 칼날은 기독교 사학을 겨냥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길바닥에 바퀴 달린 십자가를 매고 난리를 피우며 반대하는 것이다. 과거 일제와 더러운 독재자에 앞에 연속적으로 무릎을 꿇은 자들이 이제는 용감하게도 가장 깨끗한 노무현대통령을 욕하며 공격하고 있다.


예배를 하지 않을 권리를 법원에서 판결 받아 고등학생에게까지 개망신을 당하는 게 오늘날의 기독교교단이다. 신앙의 독립은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야 마땅했다. 국가로부터 교육보조금도 받고, 믿지도 않는 학생까지 배당받아 무슨 놈의 신앙을 지켜간다는 것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학교는 그렇다 치고 교회에서 조차도 아이들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모태신앙이라는 자와 엊그제 교회에 나온 자의 구분은 찬송가를 더 알고 모르는 것 밖에는 없다. 마치 유치원을 한 3~4년 다녀서 선생님과 친분도 쌓이고 때마다 치르는 행사에 능숙한 아이 같이 돼버린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한다며 흉내를 내는 교회에 가면 똑똑한 노처녀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신앙을 이상하게 적용해서 결혼을 못하게 막고 있다. 이들이 미래의 불륜 예비군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렇게 허접한 신앙에도 은혜를 부어주시어 오늘날 한국의 위상은 날로 높아가서 한류라는 문화적 콘텐츠를 발휘하게 되었다. 개혁주의사상의 모토인 ‘오직 성경으로’에 충실하여 한국교회에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