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백범 김구선생이 저격당한 현장 방문기

두 아들 아빠 2007. 10. 11. 11:17

삼성에 눌린 경교장

 

<남동쪽애서 바라 본 경교장>

 

시공자 ; 대림조(大林組) 경성지점(京城支店)

설계자 : 김세연

건축년도 : 1936년 착공, 1939년 준공

규모 :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874.05㎡(264.4평) 고전풍

형식 : 철근 콘크리트조

현소유주 : (주)삼성생명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08-1


이 건물은 광복을 맞아 1945년 11월 23일 국내에 돌아온 김구(金九) 주석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한 곳이다. 환국(還國) 이후 임시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이곳에서 열렸고, 신탁통치 반대운동·남북 정치지도자 회담도 이곳을 무대로 추진되었다.


원래 이 건물은 금광업자 최창학(崔昌學)이 개인저택으로 세웠으나 친일행위를 속죄한다는 뜻에서 김구 선생 숙소로 제공했다 원래는 죽첨장이라는 왜식 이름이었는데 근처의 경교라는 다리 이름을 본 따 경교장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남북협상 등을 주도하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이 건물 2층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그로부터 1년 뒤 6.25전쟁이 터졌다.


백범 서거 후 경교장은 원소유자에게 반환된 뒤, 대만 대사관저와 한국전쟁 당시 미국 특수부대 주둔지로 사용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오다 1967년 삼성재단에 매입되었다.

 

당초 2001.4.6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의 동 건물의 중요성 등이 재평가되면서 2005. 6. 13 국가 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되었다. 현재 동 건물 2층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김구 선생의 옛 집무실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백범 기념실' 진시되고 있다.

 

<38선을 넘기 전에 환송 나온 두 아들 인, 신과 함께>

 

<현관문을 열면 포르말린 냄새가 진동하고 백범기념실 표지판이 눈에 띤다.>

 

 <생전의 모습과 안두희의 발자국에 서서 바라본 선생이 앉아 있던 탁자>

 

<내실 전경 1.>

 

<내실 전경 2.>

 

<북한을 방문하기 전에 연설하신 모습과 59년 후의 그 자리>

 

<내실의 발자국 표시는 안두희가 저격 당시 서있던 위치>

피격 당시 피범벅이 된 탁자와 의자 사진은 실지 않았다. 

 

< 안두희가 저격 당시 서있던 위치에 바라 본 전경,

유리창에 관통한 두 발의 총탄 모습을 재현 했다.>

 

<탁자에서 바라 본 안두희가 서있던 위치, 불과 3 M도 안 되는 거리다.>

 

 

피격 직후 시신을 모신 사진 (네발의 총탄을 발사해서 안면에 두 발이 관통하였다.)

시신을 모신 뒤에 화촉도 병풍은 격에 맞지 않는데 아마 준비가 안 되어서 그런 것 같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거리 약도에는 강북삼성병원 표시만 있고 경교장은 없다.>


 

유감스런 '백범기념실'

삼성의 이병철회장과 임시정부 수반인 김구선생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왔다. 이회장은 일제의 돈을 빌려서 27세(1937년)의 나이에 경남에 200만평의 대지주가 되었다. 같은 시대인 1937년에 김구선생은 5년 전 이봉창의거를 주도했고 당시에는 일제의 남경 폭격을 피하여 목선으로 피신을 하였다.

 

연변동포 중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사람들의 조상은 당시 이병철이 대지주였을 때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간 사람들이다. 일제는 만주사변을 핑계로 대출금을 일시에 회수하여 이병철은 땅을 모두 빼앗겼다. 일제의 수탈에 앞잡이 역할을 했을 뿐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구선생의 후예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성이 1967년에 경교장을 매입하여 고려병원으로 사용하다가 의료사업에 뛰어들면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병원을 지을 당시에 경교장을 헐어 버리고 했으나 시민단체의 반발로 인해서 헐지 못하고 병원 본동으로 사용하였다.


복원된 백범의 집무실은 의사휴게실로 사용하다가 최근에야 복원한 것이다. 대기업 삼성이 2층 건물 전체를 하지 않고 집무실만 복원한 옹색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착잡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상해임시정부를 근간으로 둔다는 말이 무색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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