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이 꽂힌다.
내 감정에 충실하자! 등등
대한민국은 감성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어느 캐주얼 신발 광고는 강가에서 두 팔을 벌리고
“난! 느끼고 싶다!” 라고 외친다. 느낌은 감성의 영역이다.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물건을 팔아먹으려면 구매자의 감성을 건드려야 한다. 그래서 상업광고들은 절대적으로 감성 지향적이다.
이를 두고 오스카 와일드는 ‘호소는 주로 이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아래쪽을 때리는 방법으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감정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면 대게가 후회하기 마련이다. 감정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 후회를 하지 않으려고 자기감정에 충실했다고 자부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혼을 낼 때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분노의 매를 때려 놓고는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약을 발라주는 행위는 감성으로 덮어버리는 일인데 그 대상이 원천적으로 미워 할 수 없는 부모이기에 그 자녀는 아버지에 관하여 감정과 감성이 증폭된 외곡 된 상이 심어진다. 그래서 중년의 나이에도 돌아가신 아버지만 생각나면 눈물부터 쏟아 내기 일 수다.
요즈음에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중년 이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상당수의 가정에서 ‘밥상머리 군기’라는 것이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말을 일절하지 못하게 했다. 반찬투정을 막으려고 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정도가 심했다. 숟가락, 젓가락을 떨어트리거나, 그릇소리를 내고 씹는 소리도 커서는 안 됐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감성을 증폭시키면 된다. 감정이 부족하면 메마른 사람이라고 질타하는데 이성이 부족한 사람은 그냥 사람 좋다고 넘어 간다.
사회적으로 감성을 증폭시킨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먼저 말을 못하게 막는 사회였는데 말은 표현력이고 그 사람의 사상이다. 노래가 감성적인 행위라면 말은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다.
불의 정권들이 더러운 짓을 일삼고 있을 때 먼저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이성이 싹트는 것을 애초에 잘라버리려는 음흉한 시도다. 해방 후 친일세력은 반민족 행위자 처벌로 목을 잠시 움츠렸지만, 이내 세력을 다시 잡았다. 그 이후 나온 말이 ‘말 많으면 공산당’ 이라고 했다. 당시에 공산당은 때려잡는 대상이었다.
이성이 자라면 온전한 비판의식이 함께 자라기 마련이다.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아주 간교하게 변신을 거듭했는데 아래와 같다.
어따 대고 말대꾸야!
- 아주 무식한 경우인데 어른이라면서 아직도 이런 말을 쓰는 인간들이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 자기들은 부정과 비리로 수레를 꽉 채우고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깔보는 말이다.
침묵은 금이다.
-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주 많이 하는 이상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
말보다는 실천
- 인간은 생리적 현상 해결 외에는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하고 모르면 물어 봐야 한다. 그리고 행동 전에 남에게 자신의 행동을 알려 할 때도 있다. 이런 저런 것 따지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다.
네 탓이오!
- 사람의 관계성과 상대성 안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데 어찌 네 탓만 하라는 것인가! 그러니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지 마라. 정말 아는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 모르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모두 입을 닥치고 있으라는 것이다. 소통을 해야 정보도 공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통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 말이다.
교회에서도 성경 구절을 가져다가 말을 막았다.
‘네가 비난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난하지 말라’
‘네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을 흉본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이는 당시 자기 잘못이 더 큰 바리세인을 예수께서 호되게 꾸짖는 말이지, 인간 모두에게 한 말씀이 아니다. 비난과 비판은 다른 차원이며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대표적인 예다.
삼성은 다음포털 블로그에 ‘고맙습니다.’라는 코너를 마련하고 잘 쓴 글을 뽑아서 상금을 주고 있는데 30만원에서 최근에 100만원으로 올렸다. 우리사회가 개개인이 고마움을 몰라서 이지경이 된 일이 아니다. 이만큼 잘 먹고 사는데 고맙게 알고 살아야지 무슨 불만이냐는 것이다.
어린자녀나 아래 사람에게 ‘언행일치’를 요구하면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며 이도 말을 막는데 사용되었는데 아직 모든 것이 서투르고 이제 배우며 자라야 할 자녀나 아래 사람에게 윗사람의 기준으로 언행일치 요구는 애초에 말을 막으려는 의도다.
진정한 ‘언행일치’는 권력자나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비판을 막아왔던 자들은 자신들의 악을 말하는 노대통령의 입마저 막으려고 했다.
‘막말을 한다.’ ‘체신머리가 없다.’ 는 등등으로 폄하했다. 여기에 우매한 민중도 따라서 그렇다고 한다. 대통령이 너무 위신이 없고 가볍다는 것이다.
그럼 전두환 같은 놈을 다시 부르자는 것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인문학의 위기도 소통과 비판을 막아서 생긴 일이다. 스승의 그림자는 밞아도 되고 스승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스승을 학문적으로 절대로 비판 할 수 없는 구조의 대학은 이미 발전적 학문은 사망했다. 인문학의 위기가 정부의 보조금이 적어서 그렇다고 생떼를 쓰고 있는 대학교수들을 보면서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기득권이 계속해서 말을 막아 온 사회에서 민중들도 기막힌 말을 생성했다.
“너나 잘 하세요” 그런데 이 말을 함부로 쓰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자학적인 심성에서 나온 비아냥거림의 극치다.
과거에는 말을 할 사람은 정해져있어 아무나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정부가 인정하는 단체에 소속되어야 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는 누구나 대중에게 말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사회기 말문이 본격적으로 트이면 사회 곳곳에서 불협화음이 나올 것이다. 이는 혼란이 아니라 일종에 때 늦은 성장 통이다. 달게 받고 감내해야 한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논술로 훈련 받은 논리로 무장하여서 말을 막아 온 자들의 패악질을 여지없이 까발릴 것이다.
'사회, 지방, 농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줌마는 뻔뻔하다! (0) | 2007.11.10 |
---|---|
신입사원이 면접에 임하는 태도 (0) | 2007.11.07 |
연예인들의 줄 이혼을 보고 (0) | 2007.10.25 |
대한민국 회사에서 임원으로 살아가기 (0) | 2007.10.05 |
경부운하에 관련된 단체는 자신들의 입장을 밝혀라! (0) | 2007.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