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창조적 실용주의의 본질과 위험성

두 아들 아빠 2008. 3. 8. 11:35
 대한민국만큼 실용주의에 충실했고 성공한 나라는 전 세계에 없다.


실용주의의 핵심은 비판적 경험론을 계승하여 연구 활동에서 고정된 원칙이나 선천적 추론보다는 선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경험을 더 중시한다.


이명박식 실용주의란 이런 논점을 바탕에 둔 것이 아니라 이념투쟁은 그만하고, 잔말 말고 먹고사는 데나 집중 하라는 게 근간이다. 이게 선거에 먹혀들어 당선되었다.


대한민국만큼 철저히 실용주의로 무장한 나라는 없다.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 된 것이 경제성장이며 돈이었다. 그래서 세계가 주목할 만큼 잘살게 되었다. 그 결과가 양극화인데 이를 해결하려 들지는 않고, 계속해서 경제성장의 파이를 키워 가지는 것이다.


 

실용주의의 내세우는 이유


과거에는 좌, 우익의 이념투쟁을 이용하여 친일매국을 반공으로 감싸고 반대자를 억압하는 구실로 삼아 이익을 보았다. 현재는 잘못된 지배질서와 경제구조를 고처가자는 개혁을 쓸데없는 이념투쟁이라고 폄하하려고 실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이미 실용주의는 미국 기업정신의 합리화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정도 수준도 못되는 실용주의이기에 암담할 뿐이다. 최소한의 도덕적 가치 기준까지 밀어 버리는 시도도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도덕이 밥 먹여 주냐’는 식이다. 우리는 과거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살아 왔다.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결과가 사회 곳곳에서 불거져 나오는 대도 실용을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고 있다.


실용을 앞세워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일 수도 있다. 경험론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실용’은 독이 될 수 있다.



실용주의의 과정과 결과


실용주의를 통치 최대의 가치로 올려놓으면 우리사회는 최선의 목표의 위한 논쟁은 없어져야 한다. 논쟁은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불평하지 말고 묵묵히 일만 하라는 것인데 이는 과거 박정희 독재정권이 줄곧 사용하던 것이다.


그냥 실용주의라면 뭔가 허전한 듯했던지 앞에 ‘창조’를 붙여서 ‘창조적 실용주의’라 한다. 뉴타운이 새마을이 연상되듯이 왠지 유신헌법의 모토인 ‘한국적 민주주의’란 말이 연상된다.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철학부재로 인하여 균형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창조‘와 실용‘은 공존하기 어려운 서로 상충되는 낱말이다. 왜냐하면 실용이란 과거경험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실용에 창조란 말이 앞에 붙으면 이미 실용이 아니라 ‘실험정신’이다. 더구나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을 믿어야할 장로 대통령이 함부로 ‘창조’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그분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른가 보다.


“∼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라는 지극히 위험한 냉소주의적인 말을 초등학생들도 하고 있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학훈이나 반훈처럼 단 몇 마디로 규정 지을 수 없다. 더구나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창조적실용’이라는 단 하나의 사조를 내걸어 국정을 운영한다면 그 편협함으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창조’가 혹여 법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방식으로 흐르면 더더욱 안 된다.


국가를 운영하고 통치하는 것은 기능이전에 먼저 철학과 사상이 있어야 한다. 기능의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기업체를 운영하는 것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