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은 선택의 여지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데 부모, 형제, 자매의 만남은 자기 의지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 외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의 만남도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학교, 회사, 모임 등등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선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기반이 그리로 몰아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가 필연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만남’이라는 노래 가사도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고 가사의 처음부터 주장하고 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자주 보지 못하고 만나기 괴로운 사람은 자주 만나 곤혹스럽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향이 같은 사람들은 한 테두리 안에 있게 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 다른 이상을 지향하기에 자주 만날 수 없는 저 쪽 어디엔가 다른 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지향과 이상이 같은 그룹 안에서는 자연히 갈등과 반목이 있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은 타 그룹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선호와 호감이 있다.
단 한 번(?)의 선택인 혼인은 아주 중요한 만남인데 그동안 살아오면서 스스로 만든 ‘이상형’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잘못 형성된 이상형으로 인하여 불행한 결과를 가지고 오기도 하는데 강제성이 없다면 다 자기 책임이다. 그래서 노래가사도 ‘후회하지 마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젊고 예쁜 연예인에게 인터뷰에서 단골로 하는 질문은 어떤 남자를 좋아 하냐고 하는 것인데 이른바 이상향이다. 대게는 이렇게들 대답한다.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면 되요”
대체 밑도 끝도 없이 뭘 이해해 달라는 것인가? 이 말을 뜯어보면 돈 많은 골빈 머슴을 대리고 살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수긍하고 결혼을 하면, 자기마음대로 행동하고는 “나 이해 못해!” 이러면 그만이고 자기를 속였다고 강변하면 되는 일이다. 혼인관계에서 이해는 상대성이 있는 것이지 일방적이면 안 된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려는 관계“로 바꾸길 바란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타인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탐지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쏠림 현상이 일어난다. 다르기는 한데 그 안에서 편안함까지 느꼈을 때 열광한다.
현대사회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쏠림의 능력을 조금씩 상실해 간다는 생각이다. 자기 부모의 편안하지 않는 삶을 보고 결혼에 관심이 없어진 노총각과 노처녀가 지천으로 널려있고,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잘못 형성된 이상향으로 오늘날 ‘그냥 사는 부부’들이 많아졌고 이혼이 만연한 서글픈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하기에 만남의 선택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쏠림의 능력 회복이 요구된다.
이명박과의 '만남'은 국민과 국가적인 대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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