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가족이 서울에 자리를 잡고 네 살 많은 누이가 그 집에서 태어났으니 지금 그 집 터는 52해를 넘긴 셈이다. 서대문 밖 신촌은 말 그대로 ‘새로운 촌’이었다.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만이 덩그러니 있었는데 주변에 이화여대와 서강대, 홍익대가 있어서 신촌 일대는 이른바 대학촌을 이루고 있었다. 선친께서 신촌에 자리를 잡은 이유다. 내가 태어나서 살아 온 연대 앞은 온통 호박밭이었고 ‘바람 산’이라고 부르는 연대와 이대 사이의 남쪽에 있는 산위에는 판자 집이 덕지덕지 있었다. 그 가운데 혼자되신 막내 고모도 살고 있었다.
앞마당에 밑에서 불을 때서 덥히는 무쇠로 된 큰 종 모양의 목욕탕이 집에 있었던 기억으로 미루어 60년대 중반까지는 신촌일대 어디에도 대중목욕탕이 없었다고 추론한다. 마당에 우물을 팠는데 상수도가 동네 집집마다 들어 온 것은 1960년 중반 이후로 기억한다. 그전까지는 동네 어귀에 있는 수돗물 집에서 돈을 주고 물을 길러왔다. 그러니 씻을 물도 제대로 없어서 겨울에는 아이들의 손등은 마치 소나무 껍질 같았다. 이렇게 서울의 사대문 밖은 시골과 다를바 없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 서울에 계실 때는 지금의 주택공사 일을 하셨다. 그 이후에 집안 사정과 아버지의 뜻으로 목포의 삼학도 항만 건설 소장을 하셨는데 여름방학 때 가족 모두 기차를 타고 간적이 있있다. 60년 말 당시만 해도 지방에 서울사람이 오면 그 자체로 그 동네에 뉴스거리 였을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도 그게 보여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우쭐 감이 있었다. 도시가 주는 동경과 우월감은 어린아이도 알뿐 아니라 그만큼 도시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60년 말에 들어서야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70년을 지나 80년 초에야 비로소 지금의 신촌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그 때만해도 지금의 현대백화점 자리에 상설시장이 있었는데 제법 규모가 컸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는 부모가 그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미제물건을 취급하는 친구의 어머니가 있었다. 당시에 친구는 골프공 등 미제 물건을 연희동으로 배달하는 심부름을 해서 어머니와 배달하는 집에서 주는 용돈으로 늘 친구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었다.
신촌사거리에서 동교동사거리를 거의 다 온 우측 산위에는 이름 하여 ‘100번지’라고 부른 부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드나드는 골목 어귀 마다 자체 경비원을 둘 정도였다. 그 가운데 김대중을 따라 다니던 야당의원인 김상현씨의 대궐 같은 집도 거기에 있었다. 야당도 또 다른 귀족 신분이었다.
지금이야 원룸과 하숙집이 넘쳐 나지만 기숙사가 다 감당하지 못해 당시에는 가난한 지방학생들은 가정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면 숙식과 용돈을 해결했다. 우리 집에도 그런 가정교사 머무른 적이 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길 건너 있던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다. 1969년 12월에 완공하여 4개월만인 1970년 4월에 5층 아파트가 폭삭 무너졌는데 전시행정이 부른 참극이었다. 그 사건으로 한 반 친구의 가족이 죽었다.
베이비붐과 지방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 엄청나서 당시에 국민학교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2부제 수업을 했는데,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처럼 한반에 무려 130명이 넘게 몰아 놓고 수업을 받게 했다. 출석을 부를 수가 없어서 몇 일식 학교를 빠져도 선생님은 알지 못했다. 1970년 3학년이 되어서야 연희동에도 학교가 세워져서 절반 정도로 줄게 되었다. 당시에는 저녁밥을 먹을 때면 동네에 거지들이 떼를 지어 구걸을 하고 다녔으며 남은 밥과 반찬을 가져 온 깡통에 담아 주기도 했다.
중고등학창시절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친하게 지낸 동네 친구가 셋이 있었는데 나만 중학교를 따로 다니게 되었다. 이대를 지나서 해어져야 하는데 하루는 친구 셋이서 정문 앞에서 큰길까지 양장점의 숫자를 센 적이 있는데 약 100미터가 조금 넘는 길 양편과 골목에 150개가 넘었고 책방은 두 서너 곳이 있었다. 이미 70년 중반부터 신촌의 대학가는 환락과 소비의 중심이 되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로 인하여 서울을 계속 키워 갔는데 경부고속도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울로 가는 길은 철도와 국도에 이어서 부산에서 서울까지 신호등 없이 논스톱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70년 중반까지만 해도 지방에 사람들이 꽤 살고 있었으나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게 되었다.
일자리가 점점 늘면서 일반 서민들의 살림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서울 안에도 빈부의 격차가 나기 시작했다. 70년 후반에 들어서는 안정적인 공무원과 교사보다 일반 회사원이 더 많은 보수를 받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의 특혜를 받은 기업은 승승장구를 했으며 70년대 말에 다수확 통일벼로 대통령이 쌀 막걸리를 마실 수 있다고 T.V뉴스에 나와서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중고등학교를 마포에 있는 한 학교를 다녔는데 집에서 약2km로 도보로 30분정도 걸어야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서울 강북 중심 주변의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등 8학군의 학교는 교육구의 핵심이었다. 웬 간이 공부를 하면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었다. 베이붐시대의 많은 수가 있었고 그에 비하여 대학의 정원이 따라갈 수 없었지만 386세대라고 불리는 소수의 서울 학생들은 부모덕에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는 서울에 통행금지가 있어서 12시와 새벽 4시까지는 일반인은 거리를 다니지 못했다. 그 덕에 사춘기 시절에 잠은 충분히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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