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인정하지 않은 가정 이야기

“장가간다.” “시집간다.”

두 아들 아빠 2009. 3. 19. 07:57

  장가(丈家) 간다는 말은 글 그대로 ‘장인 집으로 간다.’는 뜻이고, 시집(媤家)은 남편의 집을 말합니다. 남자에게는 장가간다고 하고 여자에게는 시집간다고 섞어서 쓰는데 여성은 시댁으로, 남성은 처가로 간다는 뜻으로 상충되는 말입니다. 왜 이런 두 가지 말이 나왔느냐 하면,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처가살이 전통이 조선 초를 지나 중기까지 혼인을 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율곡 이이나 송시열 같은 대 유학자들도 모두 외가에서 살았고, 그들의 아버지들은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조선시대 풍속화가 중 대표적인 김홍도의 ‘신행’이라는 이름의 그림에서 혼례를 치르기 위해 길을 떠나는 신랑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말을 타고 신부 집으로 떠나는 신랑 일행인데 처가살이의 시작이었습니다. 맨 앞에 청사초롱을 든 두 사람,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품에 안은 ‘기럭아범’, 길잡이, 신랑과 백말의 늠름함 그리고 마부, 유모로 추정 되는 여인과 마부나 유모의 자식이 그려 있습니다.

 

조선 건국의 통치 이념을 성리학으로 세운 정도전은 처가살이에 대해 강력하게 제지하고 나섰는데, 그 이유는 여자가 친정에 살면서 친정부모의 힘을 믿고 교만해져 남편을 멸시하고 결국엔 부부가 반목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왕조는 모든 생활풍습도 성리학적인 윤리에 따라 바꾸려고 했습니다. 이를 왕실이 직접 모범을 보이기도 했지만, 사가뿐 아니라 사대부들도 오래 된 관습으로 인하여 쉽게 바꿔지지 않다가 조선중기를 넘겨서야 비로소 여자가 시집에서 살았습니다.

 

신사임당이 혼인 후 20년 만에 친정살이를 접고, 5살의 율곡을 데리고 대관령을 넘어 한양의 시댁으로 올라오고, 송시열의 경우는 딸에게 아들을 교육하는 방법을 담은 ‘계녀서’라는 책을 준 것을 보면 남자의 처가살이가 그 시대에야 끝났다고 봅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신랑이 처갓집에 묵어가는 것은 오랜 관습이 여운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이 시집살이를 하면서 남녀의 거처가 바뀌기는 했지만 고부갈등이라는 질기고 엄청난 억울함이 새롭게 생겨났습니다.

 

성경에서는 혼인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남자에게만 부모를 떠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남자의 독립을 분명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아주 오래 전 혼인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아들이 성인이 되어도 어른으로 대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의 집에서 성장한 사위는 어른 대접을 합니다. 그러하기에 장가 온 남자와 장인은 젊은 어른과 노련한 어른으로써 교제가 가능합니다. 이런 제도에서는 남존여비사상을 애초부터 누그러트릴 수 있습니다. 농경시대에는 그래도 남자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딸을 낳았다고 애통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 딸 잘 키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들을 많이 낳거나, 필자와 같이 두 아들만 있으면 손해(?) 보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