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왜 청소년은 머리칼에 집착할까?

두 아들 아빠 2009. 9. 21. 15:51

긴 머리를 하고 싶어서 학교에 일찍 가는 중학생이 있습니다. 잠도 설쳐가며 교문지도 때 걸리지 않으려는 애처로움입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머리칼만은 안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하기에 자녀의 머리 길이와 스타일에 대해서 관대하거나 아애 말을 하지 않는,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깨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심정을 단 한마디로 한다면 ‘억울함’입니다. 부모 밑에서 세상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데 뭐가 억울하냐고 하시는 분은 이 글을 계속 읽지 않기를 조언합니다. 혈압이 올라 건강에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머리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은 어른도 아니고, 애들도 아닌 신분자체가 억울함의 연속입니다. 응석을 부리면 “애라 이 못난 놈아!”하고 좀 어른스러운 말과 태도를 보이면 “어린 것이 벌써부터 별걸 다 한다.”고 합니다.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수태가 가능하면 생리적 어른으로 보아야하며 그에 걸 맞는 자유와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냥 어린아이 취급을 하면 아무리 좋은 말과 잘해 주어도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기본적인 억울함에 더해서 세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아서 알고 싶은데 공부에만 닦달하는데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에 머리가 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기만성 형이 있듯이 나이를 먹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머리로 공부를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개인별 집중력의 편차가 커서 무조건 공부하라고 하면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기 마련입니다. 부모들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아이는 방에 집어넣고 공부를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저 남들이 좋다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몰리는 학원에만 보내면 자기 자녀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맹신을 갖고 있는 어이없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두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와 가정, 학교가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이에 청소년들이 반발하는 구조입니다. 두발을 완전히 자율화 시키면 장발에 염색을 하고 난리가 나겠죠. 그러나 어렸을 적에 잠시라고 봅니다. 그 때는 미의 수준과 단정이라는 말의 주는 정결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우리사회가 청소년들의 억울함을 풀어 줄 근본적인 대책이 없기에 신체의 일부 자율을 적절히 억제해서 그것에 집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대의적 논리에서 밀리게 생겼으니 작고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훈련소에 처음가면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심지어 물을 마시는 시간도 통제합니다. 정말 죽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몇 주가 지나서 이를 조금씩 풀어주면 정말 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와 비슷한 수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억울함에 또 다른 억울함을 불어 넣어 주는 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