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취미

공감의 시대 <제러미 리프킨>

두 아들 아빠 2011. 5. 19. 21:10

공감의 시대 <제러미 리프킨>


이 책을 보는 순간, 엄청난 두께에 부담이 앞섰다. 책 전문만 무려 760여 쪽에 달하며 전체는 800쪽이 넘는다. 보통 책 두 배다. '공감'이라는 낱말 하나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분량에 글을 쓸 수 있을까에 마음속으로 고개도 숙여졌지만 얼마나 많고, 어려운, 장황한, 설명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나마 공감 뒤에 ‘시대’를 붙였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저자의 프로필에 대해서 모르고 읽으면 경제학자라는 것을 알기 어렵다. 너무나 다양한 방향에서 다루었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인류의 공감적 특성이 진화해 온 과정을 들여다보고 지금까지 공감이 우리의 여정에 어떻게 꾸려 왔으며 앞으로 하나의 종(種)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살펴봄으로써 문명사에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다.’라고 했다. 이 책에는 한마디로 인류사를 공감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고 있다.


책은 서문과 1부 호모 엠파티쿠스, 2부 공감과 문명, 3부 공감의 시대로 구성되어있다. 특이한 점은 책이 나오기까지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이를 도와준 사람에 대한 생색내기 식 에필로그가 없다는 점인데 유추하건데 이전에 종말론적인 책을 많이 낸 저자의 특유함이나, 아니면 공감은 멈추지 않는 인간본성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서문에서는 ‘인류사에 감추어진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이전 저서인 종말시리즈처럼 인류 종말론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왜 갑자기 공감을 꺼내 들었을까?  종말론이 더 이상이 팔리지 않거나 나름 위로를 주려고 "공감을 통한 문명사의 새로운 해석“이라며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1부 ‘호모 엠파티쿠스’는 인간의 본성과 발달 과정을 심리, 종교, 철학, 육아, 교육적 관점을 통해 공감을 비교했고, 2부 ‘공감과 문명’은 인류 역사에서 종교, 철학,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공감을 다루었으며, 3부 ‘공감의 시대’는 현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엔트로피’(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에 대해서 논하며 현재를 통한 미래의 공감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나를 말하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는 이 책에서 비관적인 엔트로피 세계관에서 희망적인 도구로 일관되게 ‘공감’을 꺼내고 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서양 철학과 정신의 근본인 이성(합리)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과학과 기술 만능주의에 상당한 피로를 느낀 것 같다.


이 책은 기독교와 철학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읽기 쉽지 않다. 더구나 사이사이 심리학까지 끼어들어서 만만치 않은 문장들이다. 공감이라는 대 주제가 있기는 하지만 잡학 다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괜찮다고 본다. 한편 사전 지식이 있는 독자는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지식과 상충되어 불편한 부분도 있다. 데카르트와 프로이드에 관한 저자의 인식이 그러하다.


서양의 철학 사조는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이성(합리)주의는 테카르트에서 시작하여 칸트에서 완성을 보았다. 그동안 경고로 위장 했지만 저자의 과거 지구 종말론 시리즈는 집단적으로 신경증에 걸린 사람들이 아니라면, 본성이 탐욕적인 인간에게 그리 와 닫지 않는다. 공감도 되지 않을 뿐 더러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종말이란 불평등은 아니기에 그리 억울해 하지 않는다. 인류가 멸망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우주의 모든 종(種)이 멸망하는 ‘종말’은 아니다. 이만한 인간 중심사고는 없다. 이걸 ‘이성’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공감의 시대는 1.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에게 철학이 위안을 준답시고 밑도, 끝도 없는 ‘긍정적 사고’라는 것을 들고 나온 것 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서양에 이성주의가 종말까지 왔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합리주의로 무장한 서양의 과학자들은 인류를 한 순간에 몰살 시킬 가공할 핵무기를 개발했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주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어처구니없는 역행을 저질러 재앙을 불러 왔다. 합리가 실용으로 극렬하게 진화한  결과다.


서양 사람의 한계가 돋보인다. 진정한 공감은 서양에 있지 않았었고 (특히 근대와 현대에서) 동양에서 공감은 만연한 본능이었다. 공감은 선한 이미지만 있지 않다. 도둑과 흉악한 강도, 독재자들도 한다. 올바른 공감의 기본 바탕과 목적은 정(情)이다. 서양에는 그 '정'이 없다.


저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인류를 이끄는 힘이 동서양이 평등화 되고 있거나 점차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분명한 징조를 아주 어려운 글로 지루(?)하게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론 놀랍고 신기한 생각도 든다. 그러하기에 같은 주제로 한국의 유능한 철학자가 쓴다면 절반도 안 되는 3백 쪽이 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 장 부터는 책의 내용과 내 생각과 관심을 일정한 주제나 연결성을 내려놓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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