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오늘 날 20대의 어려움

두 아들 아빠 2011. 7. 19. 10:28

20대라하면 1991년생부터 1982년까지 인데 인구수로는 약 730만명 정도다 전체 인구의 15.1%로 앞선 30대는 838만명이고 17.3%다. 40대도 비슷한 인구수로 현재 20대는 앞 선 두세대에 비해 백만명이상 적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로 인해 득을 보기 보다는, 도로에 비유하자면 주도로는 40대가 서행중이고 간선도로에는 30대가 정체되어 있으며 20대는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서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걸어가면 되는데 갈 길이 너무 멀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2008년 촛불 시위 진압에 동원된 전경들로 시작해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에 이어서 해병대 사건 등 군 관련 각종 사건, 사고에 20대가 중심에 있으며 피해를 보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스팩에 목숨을 걸다 시피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알바나 비정규직, 88만원짜리 인턴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 가장 많이 접속하는 세대가 20대이며 실제 실행에 옮기는 경우도 가장 많다. ‘청춘은 빛나고 아름답다.’라고 했지만 한국의 20대에게는 꿈같은 흰소리일 뿐이다. 그러 함에도 불구하고 앞선 기성세대로부터 모진 질타를 당하고 있다. 이른바 ‘20대 개새끼론’ 까지 나왔다.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하며 투표율도 형편없어 지난 정권보다 군복무 기간이 늘어 나는대도 속수무책이니 자기 밥그릇도 찾아 먹지 못한다고 한다. 20대들에게 희망자체를 버렸다는 기성세대들도 있다.


이런 문제 모두를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기 어렵다. 참여정부에서 사학법 개정을 시도했는데 사학 관련 단체들은 그악스럽게 반대했지만 정작 해택 받을 당사자들인 20대 대학생들은 수수방관했다. 등록금 반값 실현을 위해서 겨우 하루 동맹휴학을 하자고 했지만 학교 안에서 한 찬반 투표율은 30%대나 그 미만으로 처참할 정로로 낮았고 통과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정치권도 입가에 비웃음을 지을 것이며 이슈자체가 시들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두 20대에게 떠넘기는 것은 길거리에서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며 짱돌 던져 잘 먹고 잘산, 386세대의 패러다임일 뿐이다. 다시는 그런 시절로 되돌아 갈수도, 돌아가서도 안 된다. 그런데 386세대를 포함한 기성세대가 부동산 투기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속아주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을 찍어 주고는 “이 산이 아닌 겨벼” 하며 그 책임과 해결을 모두 20대에게 뒤집어씌우는 꼴이다. 돌아 가서는 안 되는 역사를 되 돌려 놓은 것은 기성세대들이었다.


현재 20대들은 과거 문민의 정부에서 태어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때 자유스러운 분위 속에서 자라고 배웠으며 과거 고등학교에서 사람 죽이는 교련을 정규과목으로 배우지도 않았다. 병영화 된 사회에서 살아 온 기성세대들과는 의식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기성세대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기들의 과거 성공경험에 비취어서 오늘 날의 20대를 이리저리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20대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우선 20대는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하는 책임 있는 성인신분이기 때문이다. 둘 째, 자신들이 살아 온 과정과 기성세대들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 어른 아이로 키운 것을 부모와 사회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려면 현재 성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개인이나 집단은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평소에는 그 어려움을 아애 없는 것처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일 때 일상적인 어려움과 겹쳐서 나타나면 좌절하게 된다. 오늘 날 20대가 그런 측면이 있다.


유독 청춘에 대한 예찬이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기성세대들이 성인이 된 젊은이들이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서 마땅한 답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좀 더 어리면 달래거나 물리적인 억압도 할 수 있지만 머리가 굵어 버린 젊은이들에게는 그도 한계가 있기 때문일 꺼다.


프로이드와 쌍벽을 이루는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 1902.6.15~1994.5.12]은 인간 형성을 문화·사회와 관련지어 설명했는데 청년기가 친밀감 대 고립감이 형성되는 단계(intimacy vs. isolation, 18∼24세)라고 하며 20대가 정체성 문제로 남녀 공히 가장 불안한 시기라고 주장했다.


청소년기에 자아 정체감이 확립되면 청년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정체성과 연결시키고 조화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자신의 고립을 배우자, 부모, 동료등 사회의 여러 다른 성인들과의 친밀감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그렇지 못하면 고립된 인생을 영위하게 된다. 인터넷은 소통에 있어서 장단점이 있다. 정보취득 면에서는 손쉽고 유익하나, 온라인의 가상세계에 함몰되어 오프라인의 관계성의 단절로 이어 질 수 있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초기 단계에서는 기계화로 인하여 일자리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이후 세분화 된 분업을 근간으로 대량생산에 이어서 대량고용이 이루어졌지만 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듯이 산업화에서 정보화로 넘어가는 현 단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자본을 굴려 돈을 버는 식의, 고용 없는 경제성장이 더 큰 문제를 불러오고 있다.


20대들은 결국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아니면 잘 견뎌 내거나! 이를 무책임한 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앞선 세대들은 전쟁을 치르거나 전쟁 같은 상황을 견뎌냈다. 20대들은 웃기지겠만 너희들이 낫다고 생각하는 게 기성세대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도서 1장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