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삶은 모순과의 투쟁과 화해 1.

두 아들 아빠 2011. 9. 8. 12:55

모순론은 고대 헤라클레이토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과 근대 철학의 아버지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와 엥겔스까지 내 노라는 철학자들은 다 다루었다. 하지만 인류는 모순 구조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모순된 전쟁을 치르고 말았다. 철학무용론 까지 아니더라도 철학이 몇몇의 잉여인간들의 머리속 관념에 치우 친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에는 철학을 전파할 인쇄술과 교육의 한계로 많은 사람이 철학을 접하기 어려웠지만 통신과 교육이 무한이 발전한 오늘 날에는 반대로 철학의 빈곤을 겪고 있다. 그저 박물관의 먼지 쌓인 철학를 뒤지고 있을 뿐이다.

 

모순론을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변증법을 거론해야 하는데 변증법은 너무나 많은 철학자들이 주물럭 거려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 난해하다. 작금에 와서 변증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존재 속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상'이라고 하면 크게 틀린 규정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철학이 관념을 뛰어 넘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됐다. 자본주의의 사회모순인 계급모순과 생산성,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 모순을 파 해쳤기에 예수 이후 금세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상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벌어지는 우연을 풀이하길 “우연이란 또 다른 우연이 상쇄시킨다.”고 했는데 이에 관한 역사적 예는 들지 못했다. ‘우연’에 ‘모순’을 집어넣으면 더 그럴 듯하다. “모순이란 또 다른 모순이 상쇄시킨다.”  마르크스 사상의 퇴조도 일정 부분 설명되는 말이다.


마르크스 사상이 시현되면서 변질도 됐지만 모순을 혁파하려는 사상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사상의 주요 실천 사항인 계급파타와 분배의 정의를 구현하는데 실패했다. 이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다.


마르크스의 모순론을 주목하는 이유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잘 분리,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으로 나누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변화의 운동이 신(神)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했는데 마르크스는 신을 쏙 빼고 운동만을 차용했다.


내적 모순이란 각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이며 선험적 모순이다. 예를 들어 여러 정황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데 부자가 되고 싶다든지, 특별하고 싶은데 결국 보편성을 담아내야 하는 개인과 집단이 갖는 어려움이 내적 모순이다.


외적 모순은 각 객체와 직접 연관은 없지만 객체가 활동 하면서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출생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남북분단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모순을 잠시 덮어 두거나 없는 것처럼 할 있어도 결코 피해 갈 수 없다.


아군과 적은 적대적 모순이고 부부사이는 워낙에 적대적 모순관계는 아니며 비적대 모순관계다. 적대적 모순이 계속 대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적대적 모순이 화합만을 유지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잠깐, 모순이 삶에서 어려움으로 나타는 것을 살펴보자면 사람이나 집단, 국가가 지니고 있는 어려움 중에서는 단시간에 해결할 수 없거나 영원히 불가능한 모순이 있다. 이것을 주요 모순(또는 근본적 모순)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이를 ‘없다!’고 치는 경향이 있는데 생활 속에서의 사사로운 어려움이 증폭되면 주요 모순과 맞닿아 더 크게 번질 수 있다. 해결 불가능한 큰 모순이 위에서부터 조여 내려 온 어려움은 원인과 해결방법조차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이 부분은 다음에 더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한반도에서 주요 모순은 단연 남북분단이며 남측에서 벌어지는 지역주의 등은 부차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과 사회적 충돌은 결국 비교적 작은 모순이 상대적으로 큰 모순과 부딪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모순에 대항과 투쟁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론 타협과 화해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변화란 내, 외적인 모순을 해결하거나 극복하려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다수의 변화는 ‘변화’ 그 자체지 함부로 변질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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