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히로시마의 저주

두 아들 아빠 2013. 11. 2. 14:35

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신의 공의가 아닌가 싶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44세) 궁내에서 잠을 자다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됬다. 이에 협력한 조선군인과 관리들도 있었다.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사건에 관련된 미우라 공사와 47명의 살인범들은 본국에 소환되어 다음해 1월에 '히로시마' 법정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주었을 뿐 아니라 영웅 대접까지 받았다. 이들 중엔 동학농민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학살한 군인도 있었다.

 

일본의 원자폭탄 투하 예정지는 모두 네 곳이었는데 그 첫번째가 히로시마였다. 명성황후 시해가 일어난지 정확히 50년 후인 1945년 8월 히로시마에는 원자폭탄이 떨졌다. 투하 즉시 약 7만명이 사망하고 이후 피폭으로 7만명이 사망하여 도합 20만여명이 사상을 당했다.

 

히로시마 원폭 당시의 유일한 사진

 

명성황후의 얼굴을 왜인에게 확인 해준 훈련대장 우범선은 어떻게 되었나?

당시의 훈련대는 일본군 휘하에 있었다. 따라서 우범선은 전형적인 친일파다.

범행 당시 우범선은 훈련대 제 2 대대장이었고 39세였다. 그는 아관파천 이후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으로 도망 가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우장춘을 낳았다. 46세였던 1903년11월. 고영근에 의해 피살되었는데 우범선이 살고 있던 곳은

히로시마 인근 구레시 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