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유아 박근혜

두 아들 아빠 2013. 11. 21. 15:27

  예전에 ‘빨갱이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유아 이문열’이라는 독한 글을 쏟아 낸 적이 있다. 이문열이 인터넷에서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십여명을 고소하려다 그만두었다고 한 적이 있다. 그 중에 나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내 글은 독하기는 했지만 명예를 훼손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명예란 변하지 않아야 하는 신념(信念)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훼손될 명예가 없는 사람이다.

 

 

그와 유사한 제목으로 글을 쓰는데 다른 점은 이문열은 아들이었고 박근혜는 딸이다. 또 이문열의 아버지는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지만 박정희는 친일파인지, 빨갱이인지, 반공주의자인지, 기회주의자인, 국수주의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박근혜의 정체성을 알 수 없는 큰 이유 중에 하나다.

 

 

대한민국 국민은 선량할지 모르지만 유권자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회창을 두 번이나 낙마시킨 국민들이 정말 잔인하다고 생각 할 사람들도 있다. 한편에선 전과 14범 사기꾼과 역사 앞에 자숙해야 할 박근혜를 연달아 불러내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살풀이라도 하려는 유권자들이 잔인하고 두렵다고도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딸에게 그대로 대입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계승자라는 선험적 운명과 결국 반란으로 무너트려야하는 대상이라는 현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인류를 진보케 했다고 감히 생각한다. 박정희의 유일한 아들인 박지만이 오래 동안 형편없이 무너진 이유는 계승도, 반란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하의 김일성도 말년엔 아들 김정일에게 비굴할 정도로 비위를 맞췄다고 한다.

 

 

딸에겐 아버지란 첫 번째 만난 이성으로 동경과 경외의 대상이다. 박근혜는 돌잡이 때 아버지 박정희는 장군이었다. 자아가 싹트기 이전인 만 9세에 아버지는 이 땅에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박근혜는 그 권력을 총칼로 이루었는지 알아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문제는 박근혜는 그 상태를 아직도 유지하고 자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아다.

 

 

한 때는 열혈충성을 다했던 전여옥이 박근혜의 단발마적 언어 습성을 보고 간파했다.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처음 한 말이 “휴전선은요?”라고 했단다. 실로 믿겨지지 않지만 사실이라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아버지가 죽었다는데 어떻게 죽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지도 않고 북한의 침략을 염려했다? 이거 정상이 아니다. 둘째는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획책하기 위해서 자기 딸마저 북한의 위협으로 세뇌를 시켰다는 말이다. 그러니 일반 국민들은 오죽하겠는가!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그냥 울었다고 해야 정상이다.

 

 

박근혜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에는 왜곡된 것이 많이 있다. 아버지가 일으킨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 통일벼 개발로 배고픔에서 벗어난 국민들, 이로 인한 국민의 존경 등 당시 언론이 왜곡 보도한 것을 그대로 믿고 있을 뿐 아니라 어머니 육영수의 죽음에 대한 실체적 사실도 왜곡으로 점철되어있다.

 

 

딸이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가정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페스트레이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보아 난망한 일이다. 당시 밤의 페스트레이디는 대한민국의 여자 연예인들이었다.

 

막판에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들을 끼고 술 마시다 최측근에게 총 맞고 죽은 상황은 아버지가 죽은 사건 자체가 충격적이지 당시의 술자리 분위는 그리 개의치 않는다. 박근혜에게 아버지란 무오류의 무소불의 한 비극적인 신(神)이었다. 박정희의 비극적인 종말은 박근혜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부처님 같은 자비로운 동정심을 불러왔다.

 

 

아버지가 죽자 어려서부터 28살까지 자기 집 처럼 살았던 청와대를 황망히 나온 후 아버지에 대해 언론과 측근들마저 폄하하고 싸늘하게 외면했을 때 배신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 분노를 박재해서 1980년부터 1998년까지 무려 18년간을 은둔생활을 하다가 정치권에 나섰고 15년 후 대통령까지 되었다. 남북한을 통 털어서 28살부터 44살까지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뿐이다. 이것도 정상이 아니다.

 

 

아들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비교적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딸은 아들보다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딸에게 아버지란 애초에 역모를 꾀할 반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근혜는 늙고 힘 떨어진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부리다 어느 날 갑자기 횡사를 했기에 연민을 느낄 기회조차 없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박근혜가 결혼을 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골라도, 아니면 정 반대의 남자를 골라도 딸은 어찌되었건 아버지가 이성의 모델이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와 유사한 사람이나 그 반대인 사람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일이다. 박근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유사하지만 아주 많이 편한 늙은 목사 최태민이 적격이었다.

 

 

결혼 상대는 아니지만 같이 일하고 싶은 끌리는 남자는 있다. 술이 떡이 된 오밤중, 빤스 바람에 여대생의 꽁무니를 쫓은 윤창중 같은 인물이다. 어느 때는 자기 아버지와 유사한 눈빛과 함께 썩소를 날리는 사람들 말이다.

 

 

박근혜는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 곧 아버지의 명예회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때나 지금이나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비명횡사로 인해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대신 그 딸을 올려놓고 이미 끝난 자신들의 인생 끝을 또 확인하려했던 것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은 어설프게 신끼가 오른 무당이 굿판 끝에 작두 위를 맨발로 올라 선 일이다. 사람이 칼날 위에 서려면 깃털 같이 올라야 하는데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무거운 짐이 계속 얹어지고 있다. 이제 혼자 내려 올 수도 없다. 한 가지 명심 할 일은 자기 아버지는 18년간 측근 중 측근을 불러 모았는데 결국 최측근에 둘려 쌓여 죽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