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기록' 전시회를 다녀 와서

두 아들 아빠 2013. 11. 2. 18:33

공주시 한옥마을에서 금강 쪽으로 고마복합예술센타가 있다. 이곳에서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기록'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역 출신의 역사 인물의 유품등을 추적, 발굴하여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지자체장의 열정이 있지 않으면 하기 힘들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평가 할 때 말로에 대해 많은 감정적 인입을 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전시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박정희가 술판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고 불쌍하다고 생각하거나, 노무현이 자살을 했다고 폄하 하기보다는 그가 살아 어떤 생각을 했고 무엇을 했는지가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전시회 제목에서 보듯이 김옥균의 사상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혁명의 가치보다는 실패한 개혁자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아 우중충한 날씨 만큼 좀 우울했다. 주말 오후 였지만 비가와서 그런지 관람을 하는 동안 객은 오로지 나 혼자였다.

 

김옥균은 고종 9년, 22세의 나이에 장원급제한, 아웃사이더가 아닌 정통 제도권으로 입신양명했다. 12년 이후인 34살에 정변을 일으켰다. 당시엔 정변이라고 했지만 '무력 혁명'이었다. 그는 '일본이 동방의 영국이라면 조선을 아시아의 블란서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가 오늘날의 한국을 보왔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혁명에 실패한 김옥균은 일본 열도의 최남단 섬과 최북단까지 이곳저곳을 떠돌며 낭인처럼 유배 생활을 하다가 1894년 44세의 나이에 상하이에서 믿었던 홍정우에게 살해 당했다. 일본 본토에서도 손쉽게 암살할 수 있었는데 그를 중국까지 유인 한 것은 살해자는 물론 시체까지 온전히 조선으로 들여오려는 치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체는 양화진에 사지가 찢겨 전시되었다. 능지처참을 당 할 인간이 어찌 김옥균 뿐이었나?

 

김옥균은 죽기 5년 전에 고종에게 아래 같은 요지로 상소문을 올렸다고 한다.

 

신은 역적이 아닙니다.

갑신년의 거사는 나라를 위한 거사였거니와 일본의 힘을 빌린것에 대해 비평하는 자가 있으나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부득이하여 한 일입니다. 신을 역적이라고 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청은 조선을 보호해 줄 힘이 없거니와 일본도 믿을 바는 못 됩니다.

지금 폐하는 어떤 방책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어 가십니까,

- 김옥균, 자운영규탄사건상소문 1889년 -

 

당시의 고종은 여기에 답이 없었다. 왕에게 신하가 답 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면 죽음 밖에는 없다. 이후에 일본도, 청나라도 아닌 러시아에 매달린 것은 김옥균의 상소문 때문일까?

 

몸에 총을 세 발 맞고 죽은 시신을 다시 사지를 찢어 강변 백사장에 말려가며 전시했는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숭리 후 사면복권 됬다. 암살자 홍정우를 버섯발로 맞이했다는 고종이 살아서 김옥균이 사면 됬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옥균의 인물평 이전에 그는 조선의 멸망을 일찍이 감지한 선각자라고 본다. 이에 대해 긴박감을 가지고 개혁을 시도했지만 시기가 빨랐다.

어쩌면 그를 도구로 사용해 역사의 시기를 앞당겼는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에 이어서 그 해 숨가쁘게 일어난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의 전환은 인간이 예측 수 없는 시기와 방법으로 불현듯 닥친다. 늘 깨어있어 대비하라는 이유일 꺼다.

 

그가 망명 시절에 쓴 시 한 수로 마무리 한다.

 

흐르는 물은 노는 물고기를 잊고

노는 물고기는 흐르는 물을 잊으니

이는 문득 하늘의 기틀이라네

하늘은 더러운 구름을 꺼리지 않고

더러운 구름은 하늘을 막지 않으니

어느 곳에 따로 부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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