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박정희정권의 부패

두 아들 아빠 2005. 9. 28. 12:57
독립군을 소탕한 Okamoto박정희시대는 겉으로 나타내지 않은 은밀한 거래가 정말 많았던 모양입니다.  다음 글은 무위님이 김은미라는 분의 글을 합작하여 올린 글입니다. 

자 박정희시대로 한번 돌아가 보십시다.  어땟는지...

1. 증권파동 : 공화당 창당 자금 마련을 위해 증금주( 현 증권거래소 )를 200배 이상 조작하여 매각 - 그 여파로 증시가 유일무이하게 정부에 의해 강제 폐장되고 상하한가 제도 생김. 또 결제부족 충당을 위해 다음해 예산의 약 18%를 전용함( 현재 예산 약 130조원 )

2. 사카린 밀수 :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증언에 의하면 독립군소탕한Okamoto박정희가 주범임.
김두한이 국회에서 비판하자 정보부에 강제 연행하여 고문.
또 장준하가 "밀수왕초는 독립군소탕한Okamoto박정희"라고 비판하자 투옥시킴.

3. 3분 폭리 사건 : 부정선거용으로 밀가루, 시멘트, 설탕을 차입하여 살포하고 그 후 가격조작(약 5배)하여 폭리를 취하게 함.

4. 차관 리베이트 : 정부가 외채를 도입하여 정경유착에 의해 약 5-10%의 리베이트를 받고 업자에게 나누어 줌 - 그 후 60% 이상이 도산하여 8.3 조치에 의해 회사채를 동결시켜 재벌들에게 천문학적인 특혜를 주고 그 결과 재벌들의 대마불사, 차입과다의 문제점 잉태.

5. 건설 리베이트 : 각종 공사를 5-10% 리베이트 받고 발주 - 원전, 지하철, 와우 아파트 붕괴, 성수대교 등 전국적인 부실 건축물 양산.

6. 박영복 부정 대출 사건 : 독립군소탕한Okamoto박정희의 종친으로 알려진 박영복이 정보부 간부와 함께 은행장에게 압력을 넣어 약 80억을 부정대출 - 단순 사기사건으로 처리.

7. 71년 대선 자금 700억 사용( 당시 1년 예산의 40%로 현재가치로 약 50조원 ).
그리고 70년대의 경우 1년에 2회( 추석, 연말 ) 각각 200억원을 측근 등 약 3000명에게 촌지로 줌 ( 정주영씨의 증언에 의하면 현대의 경우 각각 20억씩 상납 )

8. 친인척 및 측근의 축재 : 동양철관 ( 장조카 박재홍 ), 설악산 케이블카( 맏사위 한병기 ), 김종필( 운정재단 명의의 서산농장 300만평, 제주도 감귤농장, 골동품 )등 친인척과 이후락 등의 천문학적인 축재.

9. 대우사태 : 김우중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인 관계로,
대우중공업, 대우차 등을 김우중에게 헐값에 주고 종자돈까지 지원하여 재벌로 육성 - 99년 약 90조의 ''''세계 경제사의 최대 부도 사건''''을 초래케 함.

10. 농협 비료 부정 사건 : 예비역 대령 출신인 백승빈이 약 50억원( 현재가 수천억원 )의 농협 비료를 강탈함. - 단순 사기 사건으로 처리함.

11. 독립군소탕한Okamoto박정희의 축재 : 현재도 정수재단 ( 박정희, 육영수 ) 명의로 대부분 보유
* MBC, 부산일보 ; 지학순 주교 및 三和( 60년대 10대 재벌 ) 사주의 증언에 의하면 원주 MBC, 부산MBC, 부산일보 등을 강제로 빼앗김.
* 영남대, 정수기능대, 영남종금.
* 경향신문 ( 사후에 한화에서 인수 )
* 어린이 대공원
* 스위스 비밀계좌 수십 억불설 ; 70년대말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증거물 ( 1계좌에 9900만불 ) 공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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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에 기술한 사례는 공개된 사건의 일부분라네요.
60 - 70년대는 철권통치로 해방후 가장 암흑기여서 많은 사건들이 은폐 조작되었다는 군요.
실례로 공개된 사건인 1. 21 사태를 보더라도,
당시 발표는 <31명 중 29명 사살, 1명 자폭, 1명 생포> 였고 이것이 지금까지 통설로 되고 있으나, 90년대 중반 문민정부에 의해, 실제는 약 10여명이 북한으로 도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니 박정희 시대야 말로 진실이 많이 은폐될 수 있는 시대였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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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놀라운 것은  박정희시대에도 IMF사태가 수차례 왔었다는 군요. 자 더 보실까요...

97년 외환위기를 한국동란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하였으나
최근 수년 동안 다수의 경제학자, 언론학자에 의해 과거 군사 독재 치하에서 은폐되어왔던 사례 즉 74년, 80년 5월 등 다수의 IMF 사태가 조사 연구됨.

특히 전 경제 부총리 정인용의 회고록에 의하면 한국은 65년부터 97년까지 총 17회 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았고 오일쇼크 당시에는 모라토리움(국가부도)까지 당했음.(외환외자 외곬 인생 40년 : 중앙일보 2001년 4월 11일, 4월 25일자)

**참고사항: 94년, 95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시아 금융위기와 한국의 위기를 예견한 폴 크르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한국은 영원히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라는 논문에서
60, 70년대 한국은 탁월한 노동력 때문에 선진국의 자본이 투입되어 경제가 발전하였으나 당시 정권은 양적 팽창만을 추구 - 이와 같이 생산성 향상과 기술개발을 추구하지 않는 근본이 잘못된 국가는 한계를 초래한다고 에언하였답니다.**
 
박정희 정권은 당시 경제위기를 1, 2차 오일쇼크로 포장하여 면피함.
그러나 경쟁국인 대만과 싱가포르 등은 만성무역흑자, 채권국가였으나
한국은 베트남, 서독, 중동 등에서 수백만 이상의 국민들이 천문학적인 외화를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경유착, 관치금융 등의 실정으로 만성 무역적자, 재정적자 등으로 당시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와 함께 세계 4대 채무국가로 전락하고 국가부도 상태인 모라토리움까지 겪음.
(구체적으로 보면 97년의 경우 순외채가 GDP의 10% 규모라지만, 79년의 경우 약 50%이었고, 70년대 초반과 79년 이후 기업의 채무 재조정 금액은 97년 이후와 대비하여 각각 4배와 2배 규모였답니다.)

또 97년의 경우는 단기 유동성 부족 상태이라 하겠지만, 79년의 경우는 외채위기, 외환위기, 국가재정위기의 복합물이었슴.   오죽 심했으면 전두환의 취임공약이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함.  그 후에도 경제위기가 지속되다가 '프라자 협정' (85년)에 의한 3저 호황으로 구조조정을 지속하지 않아 97년 또 외환위기를 겪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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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치적이라고 하는 경부고속도로도 당시 정권 하에서 경제수석을 지낸 오원철의 회고록에 의하면, 전국차량대수가 4만대 수준으로 관료 전문가들이 모두 반대하였답니다.
박정희는 서독, IBRD 등에서 경제성을 이유로 차관을 거절하자 일본에서 외채를 들여와 건설시켰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전국 차량대수 100만대인 85년이 건설 적정 시기라 하는군요.
또 강남계발의 설계에 참여한 전문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강남 일대는 정치자금 조달 목적으로 전문가들이 설계에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덧글: 이상은 그동안 몰랐던 부분을 말한 자료들이 많아서 따오게 된 글입니다.  '무위'라는 분은 요즘 한겨레에서 활동하시는 분인데 참으로 아시는 범위가 넓은 분이신 것 같습니다.
 

 
가져온 곳: [바람돌이와 부산에서 일탈하기]  글쓴이: 바람돌이 바로 가기
 

철저히 은폐된 진실! 누구도 이런 사실을 일려고도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의견도 소개 합니다.

 

글쓴이 맥아더님.
http://www.ddanggul.org

 

박정희 대통령은 독립운동가 였다!!!!!
우리나라에는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인을 적대시 하며 그들에게 저항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3.1운동에 참가했던 분들이나 상해임시 정부요원,독립군, 그외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같이 일본 제국주의자를 암살한 분들도 있다.

그러나 그당시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겉으로 순응하면서 일제의 과학기술과 지식을 배워서 장차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살았던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들도 독립운동가 였다고 볼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일제 식민지 시절에(1917년 10.17) 태어나서 일본인 교사 밑에서 배우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만주군관 학교를 나오고 일본육사를 나와서 일본군 장교를 하였으나 마음속으로 항상 조선의 독립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무었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 했었다.

박정희 대통령 께서 조선의 독립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무었을 어떻게 할까 고민 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대구사범대학 시절의 생활과 문경 보통학교 교사 시절, 만주군관 학교 시절,일본 육사 시절에 그의 제자와 동료들에게 한말을 들어보면 알수있다.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에는 버릇없이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일본인을 꾸짖어 주었고 장발을 문제삼는 일본인 교장과 언쟁을 벌이다가 교사를 그만 두었으며 일본인이 조선의 여자들이 가슴을 드러내놓고 물을 떠는 것을 보고 조선 여자들은 예의가 없다고 하자 여제자 에게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은 못배워서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가 만주육사에 들어가기전 대구사범 시절 이순신 전기를 읽다가 일본 사람에게 책을 빼앗긴 적이있고 만주군 시절 제8단 에서 중국 공산당 팔로군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중국인 친구 고인경은 박정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박정희 소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한것 같았으나 내심은 퍽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우리가 평천진 이란 곳에 있을때 어느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인 자리에서 " 여러분! 일본과 공비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다. 언젠가는 이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라고 말했다.

공비= 공산 게릴라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육사 시절 그의 동기 이섭준의 말을 들어보면 그때 나는 거의 일본인이 다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좀 달랐다. 일본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많았다.

"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것은 군사학 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한다."고 했을때 "독립이 무었인가?" 라고 물었더니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 증언에서 보듯이 박정희는 일본육사 시절에도 조국의 자주적 독립에 대한 소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정신은 후에 자립 이라는 새마을 정신으로 이어지고 자주국방 이라는 정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때부터 이순신,나폴레옹 전기를 읽으면서 애국심을 길렀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일본의 과학 문명과 군사학을 배워서 힘을 기른다음 일본군과 공산주의자를 몰아내고 남의 나라의 간섭을 안받는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해방후 1961.5.16 군사혁명,반공,새마을운동,자주국방으로 이어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만주군 시절 싸웠던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는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일부 포함 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 당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가 라고 볼수없다.

그 이유는 민족이나 가족보다 사상을 우선시 하는 유물론적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그런 사상으로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의 비인간적 형태를 생각할때 그들은 타도의 대상이지 협력할 대상이 아니다.

그 동안 공산주의 국가들의 자국민에 대한 인권탄압,학살,고문 등을 생각하면 그들은 도저히 용서할수 없는 존재이다.

대표적 국가:북한,캄보디아,베트남,중국,러시아 등공산주의자 들은 워낙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임기응변,선전선동에 능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대다수 순진한 국민들은 그들의 선전선동에 쉽게 넘어가고 이용당하기 쉽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임기응변,선전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과는 도저히 말로써는 이길수 없으며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군사적 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군사적인 힘과 정신력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반공주의자 였던 박대통령은 반공교육 강화,자주국방을 위해서 노력 했던 것이다.

또한 박대통령은 새마을운동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고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잠시 유보 했던 것이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국민들이 자유를 마음껏 누릴수가 없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자유를 마음껏 누릴수 있다. 오늘날 이디오피아,필리핀 같은 후진국에서는 자유가 주어져도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은 독립운동가 이며 자유민주주의의 선구자 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남한 적화통일에 미국 다음으로 가장 방해가 되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청와대 기습사건,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김재규에 의한 박대통령 시해사건등 각종 테러를 일으켰으며 반공주의자 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지지는 남한 공산화에 가장 큰 걸림돌 이라는 것을 알고 박정희 대통령 흠집내기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내 좌익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일파,독재자 등과 같은 굴레를 씌우고 반공정신을 희석 시킨 다음 일반 국민들을 선동해서 남한을 공산화 하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 김대중과 그를 추종하는 전라도에는 좌익이 많은 관계로 박대통령의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비난하는 자가 많은 것이다.

과거에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들의 동정여론을 조성하고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위해서 민주화의 탈을 쓰고 활동 하다가 민주화 운동가로 알려진 김영삼 정권 시절 부터는 민주화의 탈을 쓰고 활동할수 없게 되자 진보,개혁 이라는 탈을 쓰고 국민들을 선전선동 하고 있으며 노무현의 공산당 발언 이후 우리나라엔 열린 우리당과 민주 노동당 이라고 하는 북괴 추종 정당이 생겨났다.

열린 우리당의 한자 이름은 공산당(供産黨)이며 민주 노동당은 북한의 조선 노동당과 이름이 비슷하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민주와 같은 의미로 생각된다. 조선민주주의의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전혀 다른 뜻이다.

문성근 씨의 총선후 열린 우리당은 잡탕 이라고 했는데 만약 총선후 열린 우리당의 국회의원 중에 반미친북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이 많이 당선 된다면 좌파 정당인 열린 우리당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잡탕 으로 밖에 생각할수 없고 다시 좌익 국회의원만 모아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