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간 이유
올 봄에 큰아들이 학교에서 가정 통신문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저 대충보거나 아내에게 내밀었겠죠.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평소 아이에게 아버지로서 뭔가 역할을 해야 겠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00중학교 학부모운영위원 입후보 안내문’
학교운영위원이 뭘 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아내에게 대충 이야기를 듣고 인터넷에 검색하니 ‘참교육 실천...’이 뜨더군요. 그곳에서 학부모운영위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습니다. 학부모 참여 창에 들어 가보니 어느 학교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아버지의 장문의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학교와 심각한 대립을 하여 분노에 가까운 울분을 토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해와 선거 준비
아내는 나가겠다고 하니 순순히 동의를 했고 문제는 당사자인 큰아들인데 처음에는 반대를 하더군요. 아마도 아빠가 뜬금없이 학교를 가겠다고 하니까 당혹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차분히 마주 앉아서 설득을 했습니다. 아빠가 학교일을 하러 가지만 너와 연관 지어서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너를 어떤 방식이던 구속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니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더군요.(나 원 참)
그 날로 입후보서를 작성하여 아이 편에 학교로 보냈습니다. 다음날 퇴근을 하여 집에 오니 아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글쎄 학교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빠가 무슨 일 하시냐? 아이가 초등학교때 전체 회장을 한 적이 있느냐? 공부를 잘하느냐? 꼬치꼬치 물어서 당혹스러웠다고 하면서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전 평범한 회사원이며 우리 아이는 전체 회장은 커녕 학급 반장도 한 번 해보지 못했고 공부는 그럭저럭 하는 아이였습니다. 전화를 한 학교 관계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학교에서 또 전화가 왔다고 하면서 엄마가 나오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고, 입후보자가 많아서 투표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왕 나가는 거 떨어지면 안 되겠다는 의지가 생겼고 나는 그날 밤늦께 까지 선거 규정에 의한 5분짜리 후보자 정견 발표문을 작성 했습니다.
아내는 아는 이웃에게 모두 전화를 해서 한 표 부탁을 했습니다.
신고식
선출 날 학교로 갔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학교 후문까지는 50미터도 체 안되는 거리에 있는데 후문을 막 들어서는 차에 곱상하게 생긴 여학생과 남학생 둘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다가 여학생이 한 남학생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치면서
“그래서 너 좃 물 나왔다고”
그 여학생의 얼굴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그냥 후문을 통과 했습니다.
30년만에 중학교에 다시 가는 저에게 단단한 신고식 이었습니다.
남녀평등이 욕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은 집에 돌아와서 하게 되었고 당시는 그냥 멍한 기분이었습니다.
뻘줌
학부모들이 한두 분씩 모이더니 약 300명가량 오셨습니다. 남자는 오직 달랑 나 혼자! 참 뻘쯤 했습니다. 후보자는 몰라도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나 예전에 혹시 학교 일을 해 본 아빠가 몇 분쯤은 참석 할 줄 알았습니다.
전멸! 이거 잘못 온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학교에 와서는 안되나? 퍼뜩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하랴! 아내와 아이에게 큰소리 치고 나왔는데.....
맨 앞자리에 앉아서 버티기로 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신입생부모와 신학기를 맞이한 학부모께 여러 가지 안내와 당부에 말씀을 하는 도중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정견 발표문을 꺼내서 속으로 열심히 외웠습니다.
작년도 학부모운영위원들이 다음 순서를 맞아서 진행을 했는데 후보자 많이 나왔다는 학교 관계자의 말이 무색하게 학부모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후보 정원만 채워졌습니다.
무혈입성! 편하기는 했습니다. 학교가 고의로 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힘 빠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학급으로 돌아와 학급 담임선생인과 학부형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그 날은 그렇게 싱겁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운영위원으로 나오는 것을 학교가 기피하는 이유는 좀 나중에 알았습니다. 대부분 아버지들이 나오는 경우는 애초부터 정의감에 불타는 마음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사사건건 학교와 부딪히는 것이죠. 원칙과 규정을 따지고 그 안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제지를 하고 마찰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또 나머지 운영위원들이 모두 어머니인 여자들이어서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해 제풀에 그만 두는 경우도 이 학교에서 작년에 있었다고 합니다.
학교운영예산도 심의하고 학칙규정도 정하는 과정에서 원칙에 꼭 맞게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원칙에서는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였습니다.
밖에서 보는 학교 안에 들어와 느끼는 학교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월 수십만원씩 학원에 쏟아 부으면서 만일 학교에서 돈 만원을 걷으면 난리가 나죠.
회의 끝나고 저녁을 같이 할 때 학교와 아이들 교육에 관한 이야기도 활발하게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학교 폭력문제나 학교교육의 현실을 토론 할 때는 열띠게 하였습니다. (나만~)
활동
젊은 남자 선생님들과 술자리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서는 학교와 아이들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젊은 선생님들이 별 말도 없이 술을 급하게 털어 넣는 것이 있었습니다. 낮에 학부모 한분이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이가 별 잘못도 안했는데 선생이 과하게 벌을 주었다고 교무실에서 거칠게 항의를 하고 간 모양입니다. 거칠은 정도가 선생님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였나 봅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의욕이 상실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육자로서 회의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냥 대충 가르칠까! 하는 생각 말이죠.
우리의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공부만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습니다. 친구와 교제로 사회성을 익히고 다양한 인격의 선생님으로부터 삶을 배우는 것도 있습니다. 혹여 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닙니다. 그런 일을 당했다 치더라도 문제를 풀어가고, 때로는 감내하는 힘을 기르는 것도 중요한 훈련입니다.
사회의 억울함이 학교보다 덜하겠습니까?
무작정 학교로 찾아가서 소리 지르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짧은 생각 끝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겠지요.
우리의 자녀는 부모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풀어 나가는가를 유심히 보고 배우죠.
학부모의 반응에 무척 예민하고 어려워하는 분들이 그분들입니다.
그 날은 저도 선생님들도 다음날이 걱정될 정도로 늦게까지 술을 먹었습니다.
개념없음
내 자신이 별 생각 없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은 1학기 말 무렵 학교 관계자와 학부모운영위원들이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운영위원 부모들이 각기 자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한결 같이 특목고나 외고를 보낼 려고 하고 어느 한분은 민족사관고를 준비 한다고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 여기 나오는 학부형은 일단, 아이가 공부를 무척 잘하고 그 잘함에 날개를 달아 주려고 나온 부모들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오고 싶어도 눈치보고 못나오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순간 내 뒷덜미가 뜨끔 했습니다.
이런 개념 없는 놈!
모두들 이야기가 끝나고 몇 분이 나를 처다 보 길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는 실업계학교를 가겠다고 하던데요. 그러면서 대학은 가겠다고 하길래 그러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제가 뿌린 찬물에 좌중은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술기운이 불콰하게 오르신 교장선생님이 일어나서 말씀하시길 “내가 보아하니 말 이죠. 작년에 학부모 운영위원 자녀 중에서 상장 받아서 특목고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있는 동안에는 그런 일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저를 바라보면서 “00이 아빠가 내년에는 위원장 하세요!”
날 보고 위원장 하라고! 이게 무슨 소리? 위원장은 선출직인데.........
(찬물에 또 찬물을 뿌려주신 교장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내년에는 안 나오려고 합니다.)
그 안의 분란
여섯 명의 학부모 운영위원 중에서 다섯 명인 엄마들 중에 서로가 맞지 않는 코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내분이지요.
나중에는 학교측에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전교 회장인 어머니가 운영위원장을 맞는다는 규정에도 없는 짧은 관습에 의한 것으로 이번 회장은 학생 다수의 인기가 있는 보통 아이(?)가 선출 되었습니다.
집안 살림이 넉넉지 않아서 아이의 엄마는 부담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나섰습니다. 그분과 소위 치마 바람이 쌘 엄마들과의 갈등이었죠. 그 갈등의 배후에 학교도 분명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끼어서 저도 맘고생 많이 했습니다. 갈등이 극심할 무렵 학생회장 어머니가 사퇴하겠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전화를 했습니다.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설득 했습니다. 만일 아이가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하라고 하시겠냐고?
참 고전적이고 많이 쓰는 방법이지만 이 세상 부모에게 잘 먹히는 방법입니다.
마무리
2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그야말로 무사히 운영위원을 마친 것만 해도 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제가 나와서 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아빠가 나와서 남자 선생님들과 좀 어울리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빠들을 학교로 참여를 시키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3학년을 상대로(강당이 좁아서) 다양한 직업의 아빠들이 자기 직업관에 관하여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일단 교장선생님게 뜻을 전했고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현역의 육군 중령 아버지와 회장 아버지는 섭외가 되었고 11월중에 정식으로 가정 통신문을 돌려서 지원자를 받을 예정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이 제가 학교운영위원으로 나간다고 처음 말씀드렸을 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아빠 때문에 아이가 전학을 가야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음을 감사 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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