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까맣게 잊혀진 곳

두 아들 아빠 2005. 11. 30. 18:04

아내와 연애시절인 1987년 고한(발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에서 삼척탄좌의 광부들 사택을 보수 하는 일로 약 3개월간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편지를 시내의 한 다방에서 쓴 기억이있는데 내용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고한역 근처의 여관에서 잠을 잤는데 옆방의 소음(?)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하다 알게 된 반장님이 자신의 집에서 자라고 하던군요. 몇 번 보지 않은 외지인에게 말입니다. 염치불구하고 잠자리를 옮길 정도로 여관의 밤이 힘들었습니다.

 

 

 

거실은 없고 방이 3개인 18평의 단독주택으로 전형적인 탄광촌의 사택이었습니다.

일반 광부는 13평의 방 두칸 짜리입니다.

그집에는 반장님의 아내와 두 딸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었는데 여관비 내는 셈 치고

매일 과자와 과일 등을 한 아름씩 사들고 들어가 아이들에게 '서울 삼촌'이라는 명칭으로 인가가

있었습니다.

 

탄광은 3교대 근무를 하는데 두 주일 지나자 반장님이 야간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야간근무 내내

반장님 아내는 동네 부인들 불러다 밤새 술마시며 화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같이 화투 치는 아줌마가 "총각 이리와서 같이 해!" 하던군요. 그냥 자는 척 했습니다.

반장님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해서라도 집을 나가지 않는다면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 탄광촌의 불문율 입니다.

 

제가 짐을 싸는 모습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을 뒤로하고 삼척탄좌의 건축기사의

아파트로 숙소로 갔습니다. 업무상 만난 사람인데 밤의 괴로움을 지나가는 말로 호소 했더니 선듯 자기집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외지인에 대해서 상당한 호감과 관심을 갖습니다.

 

기술직 직원은 아파트가 사택이더군요.

20대 중반의 아내와 아주 어린 딸이있는 둘다 대구가 고향인 사람이었습니다.

저녁도 밖에서 먹지 말고 자기집에서 먹으라는 호의를 받았습니다.

어느날은 밤늦께까지 술을 마시면 셋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탄광 생활의 애환을 다 이야기 하려면 몇 칠 밤을 세도 모자랄 것 같았습니다.

 

삭막한 곳이지만 인간미는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사업을 실패한 사람이나 완전 망해 먹으면 지금은 가장이 노숙자가 되고 식구들이 뿔뿔리 흩어지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온식구가 탄광으로 와 일정한 교육훈련을 받으면 사택과 우선 쓸 돈을 지원 받습니다.

아낙네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곳을 빠져 나가려면 남편이 탄광사고로 죽어서 보상금을 받는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진폐증과 규폐증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과 심심치 않게 터지는 갱도 사고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 고한과 사북, 정선 입니다.  당시에 삼척탄좌의 막장은 동해 바다 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풍경화를 그리면 개천을 까만색으로 칠하는 곳이 탄광촌입니다.

그런 곳에 '카지노'가 생겼습니다. 지금은 무연탄 처럼 까맣게 잊혀진 이야기입니다.

그때 대구출신의 젊은 부부와 반장님과 아주머니 그리고 두 딸이 어떻게 사는지 궁굼합니다.

일전에 아이들의 동화책에서 그곳에서 교편생활을 했던 동화작가인 임길택시인의 시를 읽고

그 때 생각이 아련히 났습니다.

 

아버지 가는 길

(원제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 )

               임 길택

 

빗물에 패인 자국 따라
까만 물 흐르는 길을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골목길 돌고 돌아 산과 맞닿는 곳
앉은뱅이 두 칸 방 우리 집까지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한밤중,
라면 두개 싸들고
막장까지 가야하는 아버지 길에
하느님은 정말로 함께 하실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