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25년만의 동창회

두 아들 아빠 2005. 12. 5. 11:04

모임

 

  1977년에 고등학교를 입학하여 80년대에 대학을 들어간 이른바 386세대의 선두 주자 격인

동창들이 지난 토요일 홍대 근처의 한 호텔에서 모였다.

졸업 25주년을 맞이하여 사은회를 겸한 동창회 였다.

동기 중에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친구가 노력해서 정년 퇴임한 선생님과 당시에 우리를 가르쳤던 현직 선생님들이 상상외로 많이 참석하셨다.

 

선택받은 자들

 

  강남이 개발을 막 시작하던 시기고, 당시로서는 강북 최고의 학군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어서,

그래서 조금만(?) 공부를 하면 원하는 대학은 아니더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대거 입학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선택받은 위치에 있었고 우리가 사회에 진출 하기 시작 할 무렵인

1980대 중, 후반 부터 경제가 팽창하기 시작하여 1997년 말 IMF가 터지기 전까지 모두가 잘 나가던 친구들이다. 선택받은 위치에서 운까지 좋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전공한 과와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일 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이 귀했던 시절.

요즈음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도 취직자리 얻기가 어려운 젊은이들에 비하면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그들의 불만

 

  자신들은 예전의 조직문화에서 상사와 조직에 충성을 다했으나 변화된 사회에서 선배들 처럼 미래도 보장받지 못하고, 후배에게 대접 받지 못하는 중간에 낀 세대라고 하소연한다.

월급만으로는 살아 갈 수 없는 사회 속에서 피 튀기는 경쟁으로 가정내의 소홀함으로 샌드위치 압박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고 비명을 지른다.

 

마흔 다섯의 고등학교 동창회 모습

 

  도착한 순서대로 각자 이름표를 써서 가슴에 달고 선생님께는 같은 위치에 꽃사지를 달아 드렸다. 호텔입구와 연회장 입구에 일열로 도열하여 선생님을 맞이하는데 마치 학창시절에 교문에

서 있던 선도부가 연상되었다. 당시의 위압적인 모습은 아니였으나 느낌은 그랬다.

  

  사회자인 친구의 인사말에서 여기에 나오시려고 단정하게 이발을 하신 모습에서 영원한 스승으로 남고자 하시는 마음에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또 저희가 배울 때 선생님의 당시 연세보다

현재의 저희 나이가 더 많은 데도 건강한 모습을 뵈니 마음이 놓인다는 말은 묘한 여운이 남았다.

 

  학교도 억지로 다녔는데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놈들의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다고 동창회를 아애 나오지 않았던 친구들도 이번 동창회에서는 몇몇이 보였다. 사실 30대의 동창회는 그랬다.   30대와 40대의 동창회 모습이 다른 점은 30대에는 공부를 잘해서 성공한 그릅에 두각을 나태내고 40대는 사업가와 그동안 사회 능력을 인정 받아서 성공한 그릅에서 회장단과 총무를 한다는 차이다.

이른바 의사와 변호사 그릅의 어깨에 힘이 좀 빠진 듯한 모습을 보았다.

 

  교장선생님은 우리가 입학한 연도에 40세의 연세로 교장으로 부임 하셨다.

우리학교의 후배인 가수 '비'를 예로 드시며 다양성을 강조 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인사말이 모두 끝난 후 선생님께 모두 큰 절을 올리고, 이에 성급히 일어나셔서 절을 받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감정이 복받쳐 이 나이에 콧등이 시큰함을 느꼈다. 

동창회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는 남성들의 회귀본능을 자극하는가 보다.

 

25년만의 선생님과의 재회

 

  제자들이 선생님께 술을 올리는 순서에서 난 국어과를 담당했던 선생님께 후다닥 뛰어갔다.

그만큼 뵙고 싶은 분이었다.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이항녕'씨의 '깨어진 그릇'이라는 단원이

있었다. 이를 선생님께 말하고 싶었다.

이어진 여흥과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사은회를 겸한 동창회는 끝났다.

밖에는 흰눈이 끝없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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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녕

법조인. 충청남도 아산(牙山) 출생.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939년 고등고시 문과에 합격하여 1941년 27세에 하동군수(河東郡守)가 되었다. 1945년부터 청룡초등학교를 거쳐 양산중학교 교장을 지냈고 1949년 동아대학교 교수, 1954년 고려대학교 교수, 1960년 문교부차관, 1966년 변호사개업을 하였고, 1972∼1980년 홍익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87년 이후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회장, 《세계일보》 객원논설위원, 한국뿌리찾기연합회장, 세계평화교수협의회이사장, 학술원회원 등을 지냈다. 1991년 7월 하동군에서 열린 <바르게 살기> 강연에서 군수 재직 때 개인의 출세와 보신을 위해 군민들로부터 공출을 받아내려고 죽창위협을 방관하는 일제의 앞잡이였던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과오를 사죄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소설 《교육가족》 《청산곡》 《사직이유서》, 수필집 《객설록》 《낙엽의 자화상》 《작은 언덕에 서서》
깨어진 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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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문장을 읽으시고는 그 문장에 대하여 엄청까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셨다.
결론에서 이런 일제 앞잡이의 되 먹지 못한 글이 국정교과서에 실린 사실에 분노 한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다.
약싹빠른 우리는 이 단원에서 시험 문제가 절대로 나지 않음을 알고 그 이후에 들여다
보지 않았다.
  이야기가 감명 깊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시며 부끄럽다고 하셨다.
무엇이 부끄러운신지는 자세히 말씀을 안 하셔서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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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6세대의 세가지 반성

  우리세대는 해택받은 자들이 일으킨 폐악을 역사 앞에서 고백하고 반성을 해야 한다.

 

 첫째 우리들이 잘 먹고 잘 사는데 힘쓰고 있을 때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정작 자신들은 망가진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섯던 이들의 피를 왜곡하는 짓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공부도 잘 했고 책도 더 봤다.

그들은 우리 보다도 훨씬 의식이 높았고 행동하는 양심도 우리보다 용기있었다.

그러데도 데모한 놈들은 공부를 안해서 '무뇌아' 라고 비꼬는 사람들에게 침묵으로 일관 했다.

 

  둘째 자신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사교육을 육성시켜 공교육을 위협하게 한 죄이다.

이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만큼 왔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자기의 다음세대 까지도 더 잘

먹고 잘 살게 하려는 사특한 마음에서이다. 우리와는 다른 페레다임의 사회가 펼쳐지고 있는 지도 모르고 하는 무식한 짓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해야한다.

 

  세째 자신들의 부모를 생각 해 보아라!

배운것은 부모보다 훨씬 많아도 자신이 부모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 해보아라

심리적 안정감이 더 있는가?

부모가 우리를 키울 때 만큼 고생 할 각오를 한적이 있는가?

부모보다도 돈이 훨씬 많으면서도 부모의 재산을 계산한 적이 없는가?

이도저도 아니면 도덕적으로 부모보다 더 났다고 할 수 있나?

 

  이 고백이 균형감이 떨어지고 억울하다는 우리세대를 배려하는 말로 글을 맺는다.

태고이래 우리만큼 열심히 살지 않은 세대는 없었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우리 부모님들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우리를 키웠다.

우리는 지금것 무엇과 전쟁을 벌리고 있는가?  '돈'   '명예'............

 

  문화와 의식이 앞서는 그릅이 세상을 선도 하는 것이 역사의 사실이다.

우리 세대의 의식을 선도 했던 그릅이 청와대에 있는 사실은 또 한번 행운을 잡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욕하면 당신은 끝없는 추락을 준비하고 있다.

미래를 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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