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사건 개요
2006년3월6일 새벽 0시 40분
충남 아산시에서 일가족이 탄 승용차가 저수지로 뛰어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안전벨트를 풀지 않았고, 아들은 뒷창을 통해서 뻐져 나왔지만 딸은 부모와 함께 익사했다.
먼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일가족 동반자살의 죄악성
계절적으로 따뜻한 봄이왔건만 그들에게 엄동설한의 혹독한 추위가 왔고 그 추위를 벗어 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벗어 날 수 없는 극에 다달은 좌절감이 자살을 부름니다.
일가족 동반 자살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자녀의 삶을 부모가 다 주관한다는 아주 심각한 인식이 두렵고도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인식이 있는 한 같이 살아도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동반 자살 이전의 삶도 평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종국에는 모두의 죽음을 선택한 일가족 동반 자살은 그저 살인 행위일 뿐입니다.
부모없이 자란다는 것이 만만한 삶은 분명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도 죄악이거늘 자식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크나큰 죄악입니다.
이를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식으로 동정을 하면서 면죄부를 주는 행위도 똑 같은 죄악입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일가족 동반 자살을 방조하는데 일조를 한다고 믿습니다.
동정심에 앞서 혹독하게 비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짓이라는 것을, 자녀를 죽이는 살인 행위를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작년과 재작년에 교회 예배당을 새로 짓고 늘리는데 금융권에서 대출을 약 1조원 정도 해주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밥을 굶고 죽어가는데 교회안에서는 아멘과 할레루야를 왜침니다.
교회가 구제사업을 하는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넘처나는 헌금으로 주변의 소년, 소녀 가장을 책임 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른분인가 봅니다.
경제 현상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경제 현장의 실상은 그렇지만 않습니다.
굴뚝산업에서 정보화 사업으로 노동집약적에서 기계화로 빠르게 변해가는 경제 현실에서 사람의 적응이 느린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안정적인 공직과 교사직이 유난히 뜸니다. 변화를 해도 아주 느린 걸음으로 가서 변화가 되어도 체감하지 못 할 정도이지요.
사건의 당사자는 아마도 해보지 않은 음식업을 하다가 장사가 안되고, 그러다 보니 사채를 끌어다 써서 높은 이자를 내지 못하고 점점 빚은 늘어만 가고...
뻔뻔스러운 사람들은 자살을 하지 않습니다. 심약한 사람들이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가 먹고 조진(?) 사람들은 빚 받으러 온 사람에게 뻔뻔하게 대응합니다.
반대로 남의 보증을 서서 문제가 된 사람은 어쩔 줄 몰라합니다. 아마도 그분도 심약한 심성의 한 집안의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줄여가는 지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이, 이런 어려운 현실에서는 줄여 갈 수 있는 힘과 내공을 길러야 합니다.
줄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과 동네를 고집하면 안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집을 팔고 줄여서라도 기회를 보면 됩니다.
신용불량자의 집안을 들여다 보니 승용차도 있고 가족 모두가 핸폰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왔을 때 실로 아연실색 했습니다.
평소에 집이란 그저 밖에서 돌아와서 등짝만 붙이고 잘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인식을 길러야 합니다. 제게 그런 경우가 온다면 조그만 호사는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과 부부의 침구는 모두 새것을 바꾸어 가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모험을 하다가 날린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그래서 시원치 않은 벌이라도 삶을 지탱 해주는 안전한 곳에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것이 나올때까지 알바를 나가더러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장사와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의 경우는 당장 큰 돈이 벌릴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뒤 따지지 않고 달겨들다가 험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미련
문제는 망해가는 것을 알면서도 발을 빼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빨리 접어야 하는데 질질 끌다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가는 것이지요. 밑천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미련한 짓입니다.
돈만이 우리의 삶을 지탱 해준다는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하면 돈 말고는 뭘주고 나를 부르겠냐는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치욕적인 삶이 영예로운 죽음보다 훨씬 낫습니다.
홀로 남은 중학생은 우리사회가 돌보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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