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난 같지만 시비를 함 걸어보고 싶습니다.
이 말귀는 '禮記' 檀弓上篇 에 나오는 首丘初心(수구초심)이 그 어원으로 본래의 뜻은
'여우가 죽을 때 태어난 곳을 향하여 언덕에 머리를 바르게 하는 것은 인(仁)이다.' 입니다.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본래의 뜻과는 사뭇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 오늘날 '초심으로 돌아가라' 입니다.
단기적인 상황에서는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요. 가령 학생이 밤 10시까지 도서관에서 어떤 과목의 어느 단원까지는 끝내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 초심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하지만 단기적이라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주부가 오전 10시까지는 집안 청소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아주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 찾아 왔습니다.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 찾아 온 손님을 무시하고 먼지를 피우며 계속 청소를 하시겠습니까?
일전에 야당의 총수가 천막 당사에서 당무를 보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했습니다.
당시에 차때기당이라는 국민적 지탄을 피해 보자고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는 퍼포먼스를 한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반성의 모습을 보인 것이지요.
이번에는 공천 대가성 뇌물을 받아먹은, 그전보다 더 파렴치한 짓을 했습니다.
그 초심이 온전하지도 않은데 뭔 초심으로 돌아 가자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나라당 시한부 천막당사 40일 4200만원에 계약)
돌아갈 초심은 온전하고 정의로와야 합니다. 반성의 초심은 온전한 초심이 아니지요.
한나라당의 진정한 초심은 귄위주의적인 군사독재와 그들만의 잔치가 아닌가요?
한나라당의 한계는 과거를 거울삼아서 더 나은 수준으로 가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거울삼을 것이 온존치 못하니까요. 그렇다고 그들이 과거를 진정으로 회계를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뭘 기대합니까!
그래도 그들과 함께 하려는 노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뜻이 가상합니다.
대통령 탄핵!
성공하지 못한 반란 뒤에는 피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누가 다쳤습니까?
우리는 이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 합니다. 아니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의식은 동반 진보 한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자 스스로 보복의 고리를 끊은 일이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머리를 숙여야 할 위대한 사건입니다.
이를 그저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들도 문제입니다.
뭔 초심? 최소한의 과정의 살핌과 의문도 없이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저와 같은 사람을 '초신자'라고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많이 알지 못하여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 할 수 없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변에 보면 이상한 초신자를 가끔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자기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안타깝지만 이는 자기 최면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내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자로서의 최소한의 자격인 세상의 '빛과 소금'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이미 주어진 사명마저 불성실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정을 팽개치고 전도를 한답시고 거리로 나서고, 주일에 몇 칠씩이나 온 종일 교회에 붙어 살고... 이런 것이 '믿음의 열심'이라고 은근히 분위기를 잡아가는 교회는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인가를 되 집어 봐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믿음이 더 해 갈수록 하나님의 고도한 진리가 내안에 들어오게 되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공부와 강설을 통하여 진정한 예배와 기도, 깊이 있는 회계와 성도의 교제가 더 해저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다시 믿음이 연약한 수준인 초신자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진정 아니 되는 말입니다.
(최근에 이혼한 부부의 결혼식의 행복한 표정)
연애와 신혼의 가슴 떨리고 짜릿한 에로스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 그 초심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결코 돌아 갈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잡은 물고기에는 미끼를 주지 않는다. 며 스스로를 한낱 낚시터의 물고기에 비유하여 사랑이 변질되었다고 남편을 타박하고, 투정을 부립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상황도 바뀌어 이에 따른, 다르고 더 높은 차원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초심'은 연약함입니다. 우리의 결혼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잘 알지 못하고 덤비는 것이지요. 여기에 같이 살아오고 경험한 연륜과 상황 변화에 따르는 요구를 충족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아니 되는 말입니다.
최소한 아래 세 가지는 살펴야 합니다.
돌아가고자 하는 초심이 온전하고 원숙한 것인가?
상황 변화에 따르는 내 노력과 대처가 충분했는가?
돌아가는데 있어서 내 욕심과 그로 인해서 남을 피해주는 일은 없는가?
오늘날 이혼한 많은 가정이 이렇게 생각 없고, 살핌 없이 단지 초심으로 돌아가려다 저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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