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버이날에...자녀를 양육하고 키운다는 것

두 아들 아빠 2006. 5. 8. 04:11
 혼인을 하고 처음에는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했던 적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에게 자녀를 갖는다는 사실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내 마음 속에 내재된 상실감이 작용하여 책임을 회피하려는 아주 연약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탄생하게 하시여 자녀를 양육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 의식이지만 난산 끝에 난 큰 아이를 집으로 데려 온 날 케이크를 아이의 머리맡에 두고는 아내의 손을 잡고 우리의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이 아이를 지켜주자고 했습니다. 그 케이크는 아들은 냄새만 맏고 우리 부부와, 같이 살던 두 이모가 다 먹었습니다.


사명만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생활의 안정도 주셨고 그로인해 아들은 물질적으로는 크게 부족함 없는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삶의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아비 밑에서 아이는 잘 자라 주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아비를 따라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허락 받았습니다. 성경의 말씀 중에서 가장 먼저 마음에 와 닿은 부분은 가정과 자녀 양육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물질과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아닌 아이의 영혼과 진리에 대한 살핌의 눈이 아주 조금씩 뜨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 보다는 아이의 영혼을 온전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준비하는 삶을 살도록 마음먹었습니다.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저는 학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학교 수업도 벅찬 아이를 밤늦께 까지 공부를 시키는 일은 아이를 착취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성장기와 사춘기의 아이를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키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그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해 오던 피아노를 계속하게 하여 음악을 이해하는 삶을 누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강요에 가까운 주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억울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레슨시간에만 연습을 하여도 눈감아 주었습니다. 피아노를 놓지 않게 하려는 소극적인 요구만 한 것이지요.


중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한 달 앞두고 브레이크댄스를 하고 싶다고 하여 같이 가서 등록을 해주었습니다. 그 춤이 가져 올 파괴력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춘기 억눌림의 발산 거리를 스스로 찾았다고 대견 해 했습니다. 춤이란 추는 사람에게 큰 매력을 발휘하여 온 정신이 빠지고 집중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 보는 사람도 열광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학업수준이 최소한 60~70%의 이해도만 유지 한다면 자신이 마음을 먹고 공부를 할 때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본인이 하고 싶을 것을 지지해 주면서 그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이번에 그 최소한의 선이 무너진 것이지요.


어느 정도의 학업과 음악 그리고 춤을 균형감 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좀 못 마땅히 생각 했지만 제게 확고한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크게 반대 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적극 찬성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엄마의 눈치를 봐가며 아빠의 지지를 내세워서 춤을 추러 다녔습니다. 춤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학원에 다닌 지 3개월이 안 되어서 오디션에 합격하여 팀의 견습생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아들의 비-보이 공연을 직접보고 생각을 조금 달리 했습니다.


아들은 자의반 타의반 이번시험 한 달 전부터 춤을 추러가지 않았습니다. 딴에는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진도도 나가지 않고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시험 두 번째 날, 중요과목을 풀지 않고 찍어야 할 정도의 점수를 받아왔을 때 아내는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완곡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전화 통화 중에 아내의 마음이 제게 그대로 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내일 시험을 앞두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아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엄마에게 핸드폰을 압수당한 아들은 답장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잠을 자고 난 뒤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정리 되지 않은 감정으로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죠. 제가 감정이 앞서 있음을 스스로 안 것입니다.

마침 그 날 회식 자리가 있어서 밤 11시를 넘어서 귀가했으나 아들은 잠을 자고 있지 않았습니다. 열두 시가 조금 넘어서 아들은 거실로 나와 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눈이 방안의 컴퓨터로 자꾸 쏠리는 것이었습니다. 제 말을 듣기보다는 잠자기 전에 잠시 컴퓨터를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컴퓨터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움찔하더니 아니라고 딱 잡아 때더군요. 그냥 넘어가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우려한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시험 마지막 날 학생회 어머니가 전교 선생님과 학교운영위원을 초대하는 점심 약속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주선한 두 분도 학부모 운영위원 이었고 전체 선생님과 안면도 익히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여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학교 일에 나서는 엄마들은 모두 자기 자녀가 공부를 월등히 잘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죠. 모든 과목 점수가 올백인 엄마는 나중에 한턱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 갑자기 더워지기 시작 했습니다.


식사에 앞서 아들의 담임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를 보자마자 아들의 시험이야기를 했습니다. 못 본 중요 과목의 점수를 정확히 대시면서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이전에 제가 내 뱉은 말도 있어서 기죽지 않고, 바닥을 한 번 쳐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고, 선생님은 열심을 내지 않는 아들을 매타작을 해서라도 잡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이가 공부에 집중이 되지 못하게 된 사유를 설명 드렸고, 선생님의 지도 방식을 지지하겠다고 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시험 전에 시험공부 계획서를 모두에게 작성하게 하고 점검을 하시고, 시험과목별로 ‘깜지’ 라고 하여 요약정리를 시키고 확인하는 등 열심을 다하시는 총각 선생님입니다. 저는 그분께 기대가 컸습니다. 우리 아이도 따라는 했지만 역시 건성으로 한 것 같습니다.


아비의 강권은 억울함과 반항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학교 선생님의 압박을 은근히 기대했었습니다. 이것이 부모 된 도리를 포기하거나 방관 하는 짓이라고 하면 달리 변명 하지 않겠습니다.


전체 선생님 앞에서 학교운영위원장으로서 간단히 인사말을 하고 밥을 먹는데 더운 음식도 아니건만 땀이 났습니다. 아마도 창피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 운영위원 어머니들이 어느 특목고가 좋으니 하면서 자랑을 할 때 저는 우리 아이는 실업고를 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 했는데 어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내 방식이 남과 차별되고 옳은 것 이라는 자만이 있었고, 그것이 남들에게 비쳐졌을 것입니다.

 

제 감정의 확산을 본 사람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달려들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해왔는데 좀더 지켜보자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남들이 다하는 한 줄서기를 말할 것이지요.

' 너라고 별 수 없다! '

어제 밤에 거의 뜬 눈으로 세우다시피 하며 마음을 다잡고 정리를 하였습니다.


저는 아들의 온전한 영혼을 먼저 지지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억울함 없이 자신의 열심을 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또한 아들과 차별 없이 같아지려 노력했고, 아들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춘기의 절정인 중학교 2학년 때 까지는 기다리려고 했고, 첫 시험 결과는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 바닥을 쳤습니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을 치더라도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 않겠습니다.

 

사전에 아들과 충분한 대화로 합의를 할 일지만 2학년 때 까지도 못하면 다음 학년으로 넘기고 그래도 안 되면 고등학교 진학을 1년 늦추려고 합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또 음악도 하고, 듣고... 삶의 전반을 균형 있게 준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죠.


대학진학 때 재수, 삼수도 하는데 학년만 또박또박 올려 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과연 아들이 예민한 시기에 동생뻘 되는 아이들과 같이 공부를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아비는 최대한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아들에게는 선택권을 주어서 억울함 없는 압박을 주는 것이지요.


‘공부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공부를 해야 하는 일정한 시기를 지칭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공부가 되는 시기도 다른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군대를 갔다 와서 공부를 다시 해서 대학에 진학 하던지 아니면 취업을 할 것인지 결정을 하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시기에 아비가 재정적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없으면 자력으로 해야지요. 때를 놓친 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요.

 

사람에게 각자 주어진 능력이 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잘 살피지 않고 ‘공부는 시키면 된다.’는 생각의 이면은 이 세상의 못 살고 모자란 사람들을 전부 개인의 책임이라는 논리와 통 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억지로 키워지기보다는 엇나가는 것을 더 많이 보았습니다.

정작 학업에 정진해야 할 시기에는 자녀도 부모도 지치는 것이지요. 한번 진을 뺀 사람은 다시 일어서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한계를 보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 나이 또래는 삶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인생을 살아오면서 몸소 체득했습니다.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데 자기 자식에게만은 적용이 잘 안되지요.


어제의 감정은 근래에 변화된 저의 사회생활과 일전에 자신의 사고가 감정적으로 균형이 쏠리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었을 수도 있다고 아내가 위로하지만 그보다 저의 확고한 믿음과 기도가 부족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안에서의 권면으로 키우고, 아비로서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을 쏟으며 늘 하나님께 기도 하겠습니다.

저에게 양육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소원하오면 그에 합당한 지혜와 깨달음을 원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