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의 속내

두 아들 아빠 2005. 12. 26. 10:45

제 카테고리 아버지란에 '내 아들과 혼인을 한 여인에게'라는 글의 댓글에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라고 쓰신 분이 있었다.

누구나 생각없이 흔히 쓰는 말인데 이 말의 속내를 까발려서 시비를 걸려고 한다.

이제 그분과는 상당부분 교감이 있어서 고깝께 생각하지 않으시라 믿고 적어 본다.

 

과거 여성에게 억압적인 대가족 사회에서 고통받는 며느리 편을 가끔 들어주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시아버지 였다는데서 나왔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이것부터 잘못된 것이 억압의 구도는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집안의 최고 어른으로서 거룩한 척 며느리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짓은 자신의 권위에 더욱 힘을 얻으려는 비겁한 짓이다. 그런 시아버지의 온정의 말 한마디에 남몰래 부뚜막에서 고마움의 눈물을 짠 우리들의 어머니께 이글을 바친다.

 

오늘날 같이 핵가족 현실에서는 이 말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며느리 사랑은 당연히 그녀를 선택한 남자인 남편이어야 한다.

시아버지는 자신을 지금까지 온전하게 존재케한, 고생에 찌든 늙은 자기 부인에게 사랑을 쏟아야 한다. 그사랑이 넘쳐나서 남은 사랑으로 며느리를 사랑하면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혹여 이도 체우지도 못하고 아들이 주어야 할 사랑을 가로체면 도둑질 보다 더한 악행이다.

또 한번 자신의 부인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짓이다. 

 

그 아들은 아비로부터 젊어서는 무책임과 늙어서의 야비함을 그대로 보고 배울 것이다.

 

며느리에게 사랑을 주기전에 먼저 여자에게 불편 부당한 구조를 개선하여야 하고, 아들이 자신을 보고 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며 그렇지 못하면 엄중한 권면을 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자신이 보여주지 못한 것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이 바로 아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늙어서 자신의 잘못과 악행을 낱낱이 상기한다. 이를 회개하기 보다는 늙은 늑대가 되어

교묘하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변신을 꽤하는데 자신의 늙은 아내에게 어쩔수 없이 많은 자유를 내주고 그것을 아내 사랑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 늙은 남자에게서는

여자를 억압하는 모습을 좀 처럼 찾기 힘들다. (이도 돈푼께나 남아있는 아비에게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서민이 위안을 받을만 하다)

 

그런 정도는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를 하고 있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자신의 자녀가 이를 보고 배워 그대로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뼈아푼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듯이 아들에게 훈계하고 며느리에게는 이상한 사랑을 주려고 한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과연 계속 써도 되는 말인가?

 

먼 훈날에 제 두 아들에게 이글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서 웃음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